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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이야기> 갈산면 와리 목과마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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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이야기> 갈산면 와리 목과마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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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11.06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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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과 마을의 오래된 시간에 노크를 하다

홍성군 청년 마을조사단에서는 마을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기억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홍성 지역의 소중한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

# 이장님의 마을 소개
“백야 김좌진 장군 생가지 옆을 끼고 지나 13군도를 1.5km 정도 타고 오면 목과마을 표지석이 나온다. 우리 마을 정중앙에 13군도가 지나가는 관계로 양쪽 마을이 갈라진 상태다. 그리고 첫 번째는 왕두골 고개를 넘어 장천이 끝까지 1.5km 양쪽을 끼고 우리 마을이다. 우리 목과는 30여 가구가 사는데 한 가족 마냥 그렇게 지내고 있다.”

▲ 전병군 59세, 박진희 58세.

# 첫 번째 여행: 목과 마을로 가는 길
‘외나무다리 건너 목과 마을로’

“여기 맨 처음 시집와가지고요 왜 갈산면 다리 있죠, 지금은 행산교라고 있을 거예요. 거기 시집왔을 때 다리가 없어서 외나무다리가 있었어. 그거 다녀서 그 냇가를 건너오려며는 되게 어려웠어. 그리고 막 그때는 포장이 안돼서 진흙이라 아 진짜 어려웠어요. 김좌진 생가 쪽 갈산면 마트에서 좀 들어오면 있는 그 다리야. 여기 들어오려면 그렇게 어려웠다 이거죠. 옛날 사람들 다 그랬죠 뭐. 나 시집왔을 때만 해도 등잔불 켰는데 뭐.”
-맹금자, 73세

갈산에서 목과마을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와룡천을 건너야 한다. 행산교가 준공되기 전 강에 놓인 다리는 외나무다리였다. 목과마을 주민들은 외나무다리를 건너 갈산면과 마을을 수없이 오가며 살아왔다.

“행산교가 지금은 공그리 쳤으니까, 옛날에는 나무다리로 외나무다리로 놓고 댕겼지. 그렇지, 이제 행산교 다리 가려면 거기도 있었고, 또 여짝 이동이라고 이동 위에 올라가믄 왕두골에서 쳐다보믄 여기 갈산 쪽으로 이제 퇴지로 거기 뵈는 쪽으로 거기도 있었지. 외나무다리로. 그니까 하나, 두 개.”         
-최기환, 75세

▲ 갈산면에서 목과 마을에 진입하기 위해 건너는 갈산면 다리 ‘행산교’. (2004년 9월 준공)

‘왕두골 고개를 넘어서’
목과마을에서 갈산면과 홍성읍을 걸어 다니던 시절 이용했던 높은 고갯길이 왕두골 고개이다. 옛 우마차 길을 따라가면(현 13번 군도) 멀리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질러 가기 위해 왕왕 이용했다. 현재 왕두골 고개는 깎고 깎이어 그리 높은 모습은 아니다. 현재는 버스와 승용차로 13번 군도를 통해 갈산면과 홍성읍을 다닌다. 더 이상 이용하지 않는 옛 고갯길에는 마을의 가옥과 시설이 자리 잡고 있다. 왕두골 고개에는 귀신 이야기, 호랑이 이야기, 일제시대 일본 사람들이 혈을 끊는다며 고개를 파헤치고 잘린 이야기들이 스며 있다. 그중에서도 옛 시절 주 수입원이었던 쌀을 지게에 지고 왕두골로 갈산을 오갔던 목과 사람들의 힘과 땀이 스며있다.

“그럼 호랭이가 막~ 흙 져있고 옛날에 왕두골 고개에서. 그 전에 차가 어디 있나. 그 좁은 길로 걸어 댕길라고. 산길로 거기로 오여 고개 대니고 그랬지. 지금은 도로냈으니께 그렇지 그게 왕두골 고개여.”
-박경화, 78세

“엣날에는 그런 철쭉나무 같은게 흔치 않았어. 철쭉나무가 이거(한아름) 만한 놈도 있었어 그게 바람에 넘어졌다고 그러대. 거기가 왕두골이 고개가 높아, 그전에는 높았어 그게 지금 자꾸 깎고 깎고 깎고 먼저 맨지대다가 매지고 매지고, 지금은 어떻게 되었나 모르겠네. 옛날에는 잘랐었어. 못 넘어 다녔어 높으니께. 그리고 이질(길)이 없었어. 그로해서 갈산시장을 다녔어, 그랬어.”  
-이원오, 84세

▲ 축사가 있다는 옛 왕두골 고개자리에 올라보았다. 사용하지 않는 축사가 있고 야트막한 언덕 위의 모습이다.

‘쌀 지게 메고 왕두골 고개를 넘어서’

“옛날에 우리 어려서 덜 길이 읍썼어. 길이 읍고 사람은 걸어 댕겼지 이렇게. 그래서 긴 밭에 회간에 이렇게 길도 안나고 왕두골 고개라는 데가 산가지 뒤 이렇게  봉우리 돼있잖아 그지. 목과 고개 넘어서 거기 축사 하나 있잖아. 고 우르 이렇게 넘어 댕겼어. 넘어서 갈산으로 벼 매상을 하러 가면, 농민들이 벼 타작을 해가지고  지게에다 지고 응? 그 고개를 넘어서 갔다가 갈산 시내에 창고에다가 노면 검사원들이 검사해서 등급 따라가지고 넣고 돈 받아오고 그랬지. 한 3, 40년. 한 50년 됐겄다. 68년도 60년도 65년도 그때가 하여간 60년대라고 보면 돼.” 
-최기환, 75세

왕두골이 왜 왕두골인지 알어?
“그게 일본 사람들이 여기 넘었을 때. 왕, 높은 사람 나올 자리라고 해서 그거 잘랐다 그랬어. 자른 게 뚝 잘랐지, 파냈지 흙. 흙 파내고 나무 베어내고 그랬지. 가만히 돌아다니다 보면은 산세가 좋은데 이런데 보면은 그 고랑 같은데 여기가 묏자리 좋다는 식으로, 그 자리가 높은 사람 나온다고 그 자리를 잘랐디 야. 잉. 그래서 거기 자르는데 뭐 피 나오드라고 그러지 아마, 빨간 거. 물이 나온다고 그러던데. 그게 여기 사람이 자른 게  아니야. 일본 사람들이 그러한 골짜기만 있으면 다 다니면서 잘랐다고 그랬디 야, 높은 사람 나올까 봐. 전설의 고향…전설의 고향처럼 들려 그게.  나이 제일 먹었으니께 들은 거지, 어른들한테 들은 소리지. 나 어렸을 때만 해도 여기 일본 사람들이 있었으니깐.”
-이원오, 84세

‘복작복작 배알 고갯길’
배알 고개는 목과마을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웃 마을 사람들도 갈산으로 장을 보러 가기 위해 왕래가 잦았던 꽤 북적거렸던 고갯길이다. 목과 동에서는 새젖(새우젓)을 사러 광천장을 갈 때에 배알 고개를 통해 걸어 다녔다. 고갯길 곁으로 갈산 면도가 있었는데 그 길로도 사람들이 많이 다녔다. 서해안 고속도로가 고갯길을 자르고 개통된 후로 이제 고갯길과 면도는 이용하지 않게 되었다.  

‘구항면 화리에서 꽃가마 타고 시집온 길’
“배알고개? 나 시집 올 때 가마 매고 오는디, 가마 가면 안 된다고 가지 말으라구~ 배알고개 서낭당이다가 돌로.. (돌을 세 개 던진 후에 지나오실 수 있었다) 그때는 우리 동네 사람들이 서낭당이 무신 상관이냐고 막 그러고, 가마 오는데 (목과) 사람들이 오지말라구 그랬어.”
-강환년 84세

※배알고개에는 서낭당이 있었다. 이 마을에 시집오는 신부들은 이 길을 통해 올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 시절엔  신부가 서낭당 길을 지나가는 것을 금기시했다. 그 길을 지나기 위해서 신부는 서낭당에 돌을 세 개 던진 후 지나갈 수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
홍성군 청년마을조사단(이은정, 김새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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