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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13>/ 벨로라도에 도착, 주일 오후를 즐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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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13>/ 벨로라도에 도착, 주일 오후를 즐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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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10.11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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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수<홍성읍 남장리>
▲ 이현수<홍성읍 남장리>

벨로라도 도착(남은거리 526km)

오늘 걷는 거리는 22킬로 정도로 비교적 짧고 길도 평탄해서 짐을 다 지고 산토도밍고 알베르게에서 6시 30분에 출발했다. 신기하게 어제와 같은 무게의 짐을 졌는데도 짐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다. 무릎도 괜찮고 어깨도 괜찮은데 왼쪽 새끼발가락에 생긴 물집 때문에 빨리 걷기가 좀 어려웠는데 한참 가다보니 통증이 점차 가시면서 걸을 만 했다. 오늘 길은 완만하고 긴 구릉인데다 한 시간에 한번정도 마을이 보여서 지루하지 않았다.

세 번째 마을 성당 앞 광장에서 쉬고 있는데 미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뎅그렁뎅그렁 울릴 때 승용차 한대가 성당 근처에 서더니 신부님인 듯한 남자가 성당으로 들어가다 말고 우리를 향해 부엔까미노 하고 인사하더니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한국 사람들이 워낙 많이 오니 한마디 익혀둔 듯 했다.

네 번째 마을에서 식사를 할까했는데 식사를 할만한 식당은 보이지 않고 젊은 사람이라고는 없는 듯 손 본지 아주 오래된 듯 낡아빠진 집들만 있고 마을 한가운데 있는 작은 성당도 매우 낡아보였다. 잠시 벤치에 앉아 쉬는 동안 어깨가 구부정한 할아버지 한분이 정말 느린 속도로 간신히 성당 쪽으로 걸어가시고 잠시 후 정장으로 차려입으신 할머니 한분이 빨간 꽃을 한손에 들고 성당으로 들어가시더니 잠시 후 승용차 한대가 성당 앞에 섰다. 신부님으로 보이는 남자가 차에서 내리더니 성당으로 들어갔다. 생각건대 모든 성당에 신부님이 계신 게 아니고 우리나라의 공소처럼 한분의 신부님이 여러 마을을 맡아 돌아가며 미사를 드리는 것 같았다. 이 나라 시골 마을도 젊은이들은 도시로 떠나가고 노인들만 남아 마을이 생기를 잃어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점심시간이 지나 배는 고프고 사방을 둘러보아도 마을이 보이지 않아 지쳐 갈 무렵 멀리 집들이 보이는 것이 목적지에 다 왔구나 싶었는데 우리 딸 아직 숙소를 못 정했는데 어쩌나 걱정하기에 무니시팔(공립알베르게)이 시설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주로 마을 한가운데 있어서 음식을 사먹거나 성당가기에는 좋더라고 했더니 검색해 보더니 생각보다 괜찮을 것 같다고 그리로 정했다. 들어와서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깨끗하고 순례자메뉴로 저녁식사를 9유로에 제공하는데 평이 괜찮다고 했다. 더구나 오늘은 주일이고 아주 작은 시골 마을이어서 딱히 사먹을 곳도 없다.

짐 풀고 샤워하고 빨래를 세탁기에 넣고 점심을 못 먹었으므로 뭐 좀 사먹을게 있을까하고 골목을 어슬렁어슬렁 걸었는데 피자그림이 있는 작은 바가 있어 들어가 주문하고 기다리는데 마을 할아버지들이 무더기로 들어오더니 와인 한잔씩 들고 안주도 없이 서서 수다를 한참동안이나 떨다 빠져 나갔는데 피자는 나올 생각을 안했다. 바텐더가 안쪽으로 서너 번이나 들락거린 끝에 나왔는데 겨우 냉동피자를 구워 내온 듯 맛은 형편없었다.

숙소에 돌아와 빨래를 널고 있는데 바로 옆 침대를 쓰고 계신 안산에 사시는 교우 부부께서 와인을 드시다가 한잔 하겠느냐고 묻기에 얼른 잔을 찾아다가 내밀었다. 와인을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인천에서 파리까지 같은 비행기를 탔었고 파리에서 이틀간 관광을 하고 비행기로 이동해서 우리와 같은 날 오후에 생장을 출발해 오리손산장에서 자고 나폴레옹루트를 따라 피레네를 넘었다고 했다. 우리가 출발할 때는 기상악화로 그 루트가 폐쇄되어 우회도로를 이용했는데 그날 오리손으로 간 사람들은 그 이튿날 날이 좋아져 피레네를 넘었다고 했다. 순례를 마치면 로마로 날아가서 로마구경하고 자기 세례명이 아씨시의 성프란치스코이므로 아씨시도 들르겠다고 했다.

7시에 저녁식사가 가능해서 침대에 누워서(이곳 이층침대는 높이가 낮아서 침대1층에 자리 잡은 사람은 앉아 있을 수가 없다) 이 글을 쓰는데 다른 무니시팔에서는 잠자는 일 외에는 할일이 없었던 데 비해 이곳은 침실에서도 와이파이 연결이 잘돼서 좋다.

5시 반경 빨래를 걷으러 갔더니 그 사이 비가 오기 시작했는지 고맙게도 누군가 빨래건조대를 안으로 들여놓아 주었다. 빨래를 걷어가지고 방에 들어와 창밖을 내다보니 하늘이 잔뜩 흐려있고 이내 천둥까지 치며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밤에만 내리고 내일 아침에는 맑은 하늘을 보여준다면 감사하겠다.

7시에 식사하러 2층 식당으로 올라가니 저녁식탁이 세팅되어 있는데 알베르게 주인여자 혼자 일하고 있더니 같이 일하는 사람이 아파서 혼자 일을 해서 늦었다며 와인 한 잔씩 서비스하겠다고 해 모든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바로 옆자리에 미국 아이오와주가 고향인 스테파니아라는 이름의 아가씨가 앉았는데 여기 오기 전에 캄보디아에 잠시 동안 살았었고 서울에도 6일 동안 있었는데 한국의 여러 가지 음식들을 먹어 보았는데 벌써 그립다고 말했다. 우리끼리 장봐다 밥해 먹어도 좋지만 더러는 오늘처럼 식사를 같이하면서 짧은 영어로나마 대화를 하는 것도 즐겁다.

내일은 28킬로미터 정도로 갈 길도 멀고 비도 올 것 같아 짐을 부치고 가벼운 몸으로 걷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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