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연 많은 노루목 고개
1970년대 초 어느 해, 벗재산과 삼불산을 연결하는 노루목 고개를 절개하는 공사가 진행됐다. 지금의 장비들과 비교하면 천지차이로 좋지 않은 장비로 구멍을 내 암석을 뚫는 작업을 하고, 다이너마이트를 쌓아 폭파시키는 기나긴 작업들을 반복하고 나서야 단단한 바위 고개를 잘라낼 수 있었다.
“그때는 바위를 깰라면은 다이너마이트 폭파해서 깨는게 수단이었으니까 며칠 구멍을 뚫고, 며칠에 한 번씩 폭파하는 거지. 그런 식으로 짤르더라고.”
-박창신(58세·남)
그 결과로 벗재산을 휘감아 돌아 흘러가던 와룡천 물길이 그 잘라낸 두 산 사이로 흘러감으로써 마을 안까지 물길이 닿지 않게 되었다. 또 그 사이로 도로도 내어 원와마을 서쪽으로 진입이 가능케 됐다.
이렇게 큰 공사와 변화가 있기 전, 노루목 고개에도 사연이 있었는데,
“어른들 담배 피고 술 먹을 때 줏어들은 소린디, 일본 식민치하 때 혈맥을 끊는다고 허지. 쇠말을 박고 한창 할 때가 있었는데, 요 너머에 김좌진 장군하고 저쪽 한용운 선생하고 이 양반들 힘을 못 쓰게 허기 위해서 그 산을 끊는다고 끊었었어. 우리 어려서 보면은 탄광에서 탄을 싣고 밀어내는 밀차 있잖아. 그거 갖다놓고 파내고 그랬었대.”
-박찬규(60세·남)
일제 강점기 때 노루목 고개를 자르려는 시도가 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와룡천 물길을 바꾸려는 의도는 아니고, 인근 마을에 사는 영향력 있는 사람들의 힘을 꺾고 혈맥을 끊겠다는 의도였다고 한다. 지금의 생각이지만 실제로 현재 모습처럼 노루목 고개가 잘렸던 건 아니지만 말뚝을 박고, 고개를 파내는 등의 작업을 통해 일본 나름대로 우리의 혈맥을 잘랐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고, 노루목 고개에서의 또 다른 재밌는 이야기가 있는데,
“공사 끝나고 다이너마이트 폭파 안된 게 남을 수 있다. 조심해야 한다 했어도 그냥 거기 물 흐를 때 가서 보면 짤른 큰 바위 속 같은데 보면은 간혹 쑥색이라든가, 보라색이라든가 빛이 조금 특이한 색깔이 나. 그럼 그거를 파보면은 강도가 있어야만이 보석으로 되는 거지, 강도가 없으면 아무리 아름다운 색깔이라도 보석은 안 된데.”
-박창신(58세·남)
그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박창신(원와마을 이장)님의 매형이 옥석을 채취하는 일을 하고 있어서 반지나 장신구를 만들기 위해 함께 그 공사 현장으로 돌을 캐러 같이 갔었다고 한다.
긍께 일석이조인 거지
원와마을 앞을 지나 돌아가는 와룡천 물길이 마을 사람들에게 선물한 그때의 소소하고 행복한 추억, 그것과 함께 안겨준 침수 피해에 대한 기억, 그리고 그 물길을 잘라낸 노루목 고개 절개 공사와 농지정리에 대한 기억들이 스쳐 지나가고 지금의 원와마을의 모습을 바라본다.
“그 산맥을 잘라서 곡선을 반듯이 감아놓고 하천 부지가 다 농지로 바뀐 거여. 긍께 일석이조인 거지. 하천이 범람하는 걸 막을 수 있었고 또 농지가 많이 생기고 마을 주민이 경작하면서 소득이 더 늘어났고 농가 살림살이가 늘어난 거지.”
-박창신(58세·남)
이제는 마을 길 가까이로 흐르는 와룡천의 물길을 만날 수도 없고, 마실 수도 없고, 물장구를 칠 수도 없고, 빨래를 할 수도 없게 되었지만, 그 대신 드넓은 논에서 보기만 해도 배부른 벼가 익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더 이상 집 앞으로 물이 넘어와 피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저기(노루목 고개) 안 짤랐으면 여기 아주 형편없어. 저기 잘라서 냇물을 다 일로 뻗치고 여기 다 농사짓게 맨들고 그랬지. 그래갖고 와리가 더 부자 됐잖어.”
-임화점(91세·여)
와룡천 공사가 진행되기까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공사를 통해 넓은 농경지를 얻을 수 있고, 침수 피해에 대한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겠다는 주민들의 바람이 가장 큰 이유이지 않았을까.
“그때 당시는 그게 절실하게 요구됐던 상황인 거 같애요. 왜 그러냐면 냇물이 범람해가지고 보통 그때 당시 100ml만 오면 여기는 자연천이잖아유. 그래서 마을로 감아 돌았는디 앞뜰이 얕은 곳이다 보니까 냇갈허고 같이 가다시피 해서 큰물이 오면 휩쓸려 나가고. 어렸을 때 보믄 뭐 옥수수밭, 콩밭이 다 빗물에 휩쓸려가지고서 수확을 못할 때도 있었고 그랬어요. 아마 그때 주민들의 바램이었을 거예요.
-김성진(63세·남)
지금의 원와마을의 모습은 마을을 따라 길게 펼쳐진 드넓은 논이 가득한, 주민들의 바람대로 살기 좋고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다.
“지금은 살기 좋어”
-박성현(85세·남)
홍성군 청년마을조사단(주란·문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