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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이야기> 갈산면 와리 원와마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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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이야기> 갈산면 와리 원와마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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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9.25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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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을은 천지개벽한 마을이여”

‘홍성군 마을만들기 지원센터’가 홍성지역 마을의 발전 가능성을 발굴하기 위해 청년들로 구성된 ‘마을조사단’을 통해 지난 5월부터 마을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조사단이 발굴 결과로 엮어 인터넷에 연재하고 있는 ‘마을이야기’를 옮겨 싣는다.
<편집자 주>

 

굽이굽이 흐르던 냇물이 따뜻한 쌀밥이 나오는 땅으로
반듯한 글씨체로 ‘와리 원와마을, 어서 오십시오’라고 쓰인 표지석을 지나 마을 안길로 들어서면, 드넓게 펼쳐진 논과 곳곳에 세워진 비닐하우스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눈길이 닿는 곳마다 큼지막한 논으로 가득 차있어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마을의 경계인지, 어느 땅까지 농사를 짓고 계신지 알기 어려울 정도로 그만큼 이 너른 들판은 주민들의 삶터이자 일터이며, 동이 틀 때부터 저물 때까지 오롯이 이 땅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다.

▲ 원와마을 입구에 놓여있는 표지석.

하지만 불과 40년 전만 해도 원와마을의 풍경은 조금 달랐다. 논이 들어서 있는 자리에 마을 서쪽의 용천뿌리를 휘감고 따라 들어온 냇물이 넘실넘실 흘렀고, 현재 마을회관의 앞길 건너편에 있는 벗재산을 휘감고 돌아 다시 서해로 나갔다고 한다.
 
그 천(川)의 이름은 ‘와룡천’
엎드릴 와(臥), 용 용(龍) 자를 써서 용이 엎드려있다는 뜻을 가진 강. 지금은 공사로 인해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지만, 예산군 수덕사부터 시작된 아주 길고 구불구불한 물줄기를 보면서 용이 헤엄치는 모습을 상상했던 것 같다.

▲ 노루목 고개(위쪽)와 와룡천을 건널 수 있게 만든 와리교(아래쪽).

주민들의 기억에 따르면, 1970년대 초반에 벗재산과 갈산면 오두리 사혜마을 앞에 있는 삼불산 사이를 잇던 노루목 고개를 잘라 와룡천 물길을 바꾸는 공사가 진행되었다. 당시 원와마을의 지대가 낮아 서해의 바닷물이 거꾸로 들어오기도 하고, 비가 많이 오면 홍수가 나서 길가에 있는 집들은 마루와 문지방이 잠기거나 정성스레 심은 농작물도 먹을 수 없게 되었다고. 침수 피해로 마을 사람들이 점점 살기가 어려워지면서 정부 새마을사업의 일환으로 와룡천 공사가 이루어졌다.
또 마을 안에 들어오던 냇물의 길을 마을 밖으로 바꾸면 냇가 바닥을 전부 논으로 만들어 농지를 늘릴 수 있었기에, 쌀밥이 귀하던 그 시절에는 홍수의 피해도 막고 쌀 생산량도 늘릴 수 있으니 더욱 꿈같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한 때 용이 지나가던 마을은 멀리서 바람이 나부끼면 하늘하늘 춤을 추는 금빛 땅으로 변하게 되었다.
※노루목: 노루가 자주 다니는 길목 혹은 넓은 들에서 다른 곳으로 이어지는 좁은 지역

그땐 그랬지
“옛날에 우리 초등핵교 다닐 때는 하천 보믄 고운 모래가 있어. 그걸루 이빨 닦고 손때 있잖어? 그걸로 비볐다구.”
-박성해(87세·남)

태어나서부터 평생 떠난 적 없이 원와마을에 몸담고 살아온 박성해, 김봉복, 박성현 세 어르신이 아득히 먼 옛날의 와룡천을 추억한다. 여직까지 농사지으며 살아온 세월이 어언 70년.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그 시간을 7번이나 지나 보내면서 굽이굽이 흘러온 삶의 역사도 깊게 팬 몸의 주름만큼이나 깊숙이 새겨져버렸다.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시절은 날이 갈수록 더 또렷해지기만 한다.

“민물고기가 겁나게 많았어. 물이 을마나 맑고 깨끗한지 거기 장어, 붕어 잔뜩 있었어.” 
-박성해(87세·남)

서해로 흘러가는 기다란 물길. 그 길을 따라 온갖 물고기들이 넘나들었다. 너나 할 것 없이 물고기 잡기는 동네 아이들의 가장 재미난 놀이였고, 첨벙첨벙 발길 닿는 모든 물속이 놀이터가 되었다.

“당시 새암이라는게 공동샘 밖에 없었지. 식수가 우리 부락에 몇 개 없었어. 하루 종일 일하고서 모래 파고서 물먹고 목욕하고.”   
-김봉복(86세·남)

지금은 집집마다 욕실이 있고 수도꼭지를 틀면 바로 물이 쏟아져 나오지만, 그때는 마을 사람들 모두가 세 곳밖에 없는 공동우물에서 물을 길어서 나누어야 하는 넉넉지 못한 시절이었다. 그 가운데 냇물은 넓은 우물이 되고, 빨래를 할 수 있는 터가 되고, 여름철에는 멱 감는 피서지가 되면서 마을 사람들의 목마름과 고단함을 달래주었다.

허허바다가 된 안뜰
이렇듯 마을의 귀하디 귀한 식수이자 하나의 상징이기도 했던 와룡천의 의미가 달라진 것은 홍수가 나면서부터다.

“비가 오면 마을 안까지 물이 차버렸어, 홍수 나서. 우리 집은 고 윈디도 물 차고 다 했어. 황무지 되고 그랬어.”
-김봉복(86세·남)

요즘은 가뭄 때문에 몸살을 앓지만, 예전에는 비가 너무 많이 오는게 걱정거리였다.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로 홍수가 나면, 큰물이 휩쓸고 간 곳은 전부 황무지로 변해버렸다. 부지런히 일하고 일해도 끝이 없는 날들. 심어 먹을 농작물들도 전부 쓰러지고 없었다.

“그전에는 산이 황폐화돼서 비 오면 산물이 지하로 안 가고 냇갈로 와가지고 매년 쥑였어. 가을에 볏단까지 다 바다까지 떠내려가고 말할 것도 없어.” 
-박성해(87세·남)

“예전에는 홍수가 나도 나무가 없으니께 하천으로 다 내려온 거지.”   
-김봉복(86세·남)

그렇게 떠내려 온 물을 퍼내느라 온 마을이 정신이 없었다. 스물 남짓할 적에 서산 고북면에서 시집을 와서 여태까지 살 비비며 살아온 임화점, 김갑희 할머니는 당시만 생각해도 ‘말하면 뭣 혀’라는 소리가 나온다고. 마을 안에서도 꼭대기 집이었던 김갑희 할머니 댁은 홍수가 날 적에 잠시나마 몸을 피할 수 있는 피난처가 되기도 했다.

▲ 고향인 서산에서 같은 마을로 함께 시집온 사촌지간인 임화점, 김갑희 할머니(왼쪽부터).

“큰물 나면 우리 집이 꼭대기였으니께 손주, 딸들 다 올라왔지.”    
-김갑희(81세·여)

“우리 큰댁은 물이 문지방까지 올라왔어.”
-임화점(91세·여)

다행히 큰물이 덮쳐 사람이 다치거나 떠내려가진 않았지만, 언제 어떻게 될지 몰라 늘상 가슴 졸이면서 살아야 했던 순간이었다. 

“우리 부락이 천지개벽을 했다고 봐야 혀. 왜냐면 저기 고개 잘랐잖어. 안 잘랐으면 형편없었어. 침수가 심했으니 집에도 물 차고 허허바다여.” 
-박성해(87세·남)

가지 않을 것 같던 날들이 가고 고달픈 기억 너머로 마을의 시간은 다시 유유히 흐른다. 반가웠던 와룡천의 물길도, 원망스러웠던 와룡천의 물살도 모두 가슴속에 품은 옛이야기로 고스란히 남게 되었다.    

<다음호에 계속>
홍성군 청년마을조사단(주란·문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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