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9 08:41 (금)
광복 73주년 특별 인터뷰<2> 한국전쟁 반공포로 석방된 전 인민군
상태바
광복 73주년 특별 인터뷰<2> 한국전쟁 반공포로 석방된 전 인민군
  • 이번영 기자
  • 승인 2018.08.14 14: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전쟁은 무조건 안됩니다”
▲ 거제도포로수용소 기념탑

장백일씨는 1951년 7월 어느날 부산 임시 포로수용소에서 거제도 제 73포로수용소로 이송됐다. 그날 수용소 정문에 들어선 장씨는 광장에서 인민군 제식훈련 장면을 보고 여기가 인민공화국인가 하고 놀랬다. 수용소 안에도 좌익과 우익이 서로 싸우고 있었다. 그해 12월 23일 밤에는 폭동이 일어났다. 우익 5명이 피살당했다. 장씨는 다음날 아침 점호시간에 수군거리며 웅덩이에 피가 고여 있다는 등 흉흉한 소리들을 듣고 알았다. 미군들이 무장하고 들어와 총 쏜 자를 찾기 위해 샅샅이 뒤지며 살벌했다. 다음해인 1952년 5월 7일에는 수용소 소장 돗드 준장이 포로들에게 납치됐다 석방되는 등 냉전시대 이념갈등의 축소판이 거기서도 펼쳐졌다.

거제도에는 13만2000명을 수용한 국제연합군측 최대 규모의 포로수용소가 있었다. 이들은 반공(反共)포로와 공산포로로 나누어 대립하였는데, 분열의 원인은 1949년 제네바협정에 따른 포로 자동송환이 아닌 자유송환을 국제연합군측이 주장하면서부터였다.

1951년 여름부터 휴전회담이 시작되자 포로 교환 문제가 논의됐다. 북한은 포로 전원을 석방, 북으로 돌려보내라고 요구했으며, 남한은 공산주의를 싫어하는 포로는 보내지 않겠다고 하는 등 교환 방식에 입장차를 좁히지 못한 교착상태가 계속됐다.

“포로되면 자폭하라” 명령 안 지켜

1952년 12월 북으로 갈 사람과 남쪽에 남을 사람을 가리는 심사가 진행됐다. 부대 밖 콘센트 막사에서 5~6명의 심사위원이 한 사람씩 불러 몇 가지를 질문했다. 남쪽에 남을 경우 책임 져줄 사람 아무도 없다는 점과 고향에 있는 부모가 보고 싶지는 않나 등 형식적인 몇 가지만 묻더라고 장씨는 말한다.

필자는 장씨가 왜 고향으로 가지 않고 남쪽에 홀로 남았는가 하는 점이 가장 궁금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인민군에서 교육받을 때 만약 포로가 되면 자폭하라고 명령받았어요. 그런데 자폭하지 않고 살아서 북으로 갈 경우 총살당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고향에 있을 때 남북을 오가며 장사를 했기 때문에 자유대한민국 체제와 장점도 잘 알고 있었거든요. 남쪽 38선 근처에는 사촌도 살고 있었습니다.”

1953년 4월 부상당한 포로를 우선 교환했다. 한국군과 유엔군 684명, 북한과 중공군 6670명이 교환됐다. 나머지 송환을 바라는 포로는 휴전 후 60일 이내에 송환하며, 송환을 바라지 않는 포로는 중립국송환위원회에 인계해 90일간의 설득기간을 갖는다는 등에 합의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협정을 무시하고, 반공포로를 6월 18일 0시를 기해 모두 석방해버렸다. 논산을 비롯해 7개 수용소에 분산·수용되어있던 3만7000명의 포로 가운데 2만7092명의 반공포로를 석방했다.


미군 감시원을 내쫓아가면서 감행된 이 사건은 세계적인 물의를 일으켜 UN군의 긴급회의, 한국참전국회의 등이 열리고 북한측은 강력히 반발했다. 각 수용소장은 소수의 행정참모와 기술참모를 거느린 반면, 경비 병력의 대다수는 한국군이었다. 반공포로들은 한국군 경비병의 묵인과 협조 하에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하는 방법으로 석방했다. 56명의 포로들이 탈출과정 중에 사망했다. 장백일씨는 논산으로 이동된 73 수용소에서 탈출하는 과정에 미군이 쏜 총에 맞아 한쪽 발목을 절단해야 했다.
“밤 열두시 한국군 경비대가 철조망을 끊어놓고 탈출하라고 하더라구요. 철조망을 넘는 순간 흑인이 운전하는 미군 짚차와 마주쳤어요. 연막탄을 터트리고 사정없이 총을 쐈습니다. 총 한 발이 제 발에 맞았습니다.”

미군은 다음날 민가에 숨어든 포로들을 색출하고 다녔다. 그러나 주민들은 탈출 포로들을 숨겨주고 음식과 숙소를 제공하며 따뜻하게 대해줬다. 행정기관은 포로들을 도와줬다. 미군 당국의 재수용 노력은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탈출한 포로들은 대부분 지방주민들과 섞여 버렸다.

논산에서 이장 맡아

장백일씨는 숨어있던 일행과 함께 강경에서 나룻배를 타고 논산군 성동면으로 건너갔다. 마중 나온 경찰과 이장들에 의해 15명 내외씩 그룹을 지어 부락으로 분산 배치됐다. 주로 살 만 한 집에 2~3명씩 들어가 일을 하며 밥을 먹고 지냈다. 얼마 후 그들은 대부분 한국군에 보내져 국군이 됐다. 일부는 공비 토벌대로 보내졌다. 장씨는 공비토벌대로 경남 합천 해인사 뒤 가야산으로 갔다가 논산 대둔산 공비토벌대에 배속됐다. 장씨는 토벌대 활동이 끝난 후 다시 성동면으로 갔다.

장씨는 논산군 성동면에서 품팔이로 시작해 착실하게 일했다. 성동면 병천리에 터를 잡고 농사지을 땅도 구입했다. 그 지역 부인을 만나 결혼했다. 주위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며 병천리 이장을 맡았다. 그러나 밑으로 좌우 이념 대립이 짙게 남아있는 현실이 부담스러웠다.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낯선 지역으로 피난 가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찾아온게 홍성이었다. 그는 홍성이 이렇게 논산과 가까운 줄 모르고 왔다고 말한다. 장백일씨는 1969년 무작정 홍성에 와서 처음에 포목장사를 생각했다. 그러나 아는 사람이 그 장사를 하고 있어 접었다.

해마다 10월 강화도서 망향제
 
신경희 경향신문 홍성지국장이 장씨에게 지국 총무로 함께 일하자고 권고해 그를 따랐다. 신경희씨는 황해도 출신으로 장씨 고향 집에서 25리 떨어진 곳에 살던 동향인이었다. 신경희씨는 뒤에 장씨에게 경향신문 지국장을 넘겨주었다. 장씨는 중도에 다른 일간지 신문 홍성지국장으로 27년 동안 일했다.

장씨는 이산가족 상봉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남한에 내려와 살고 있는 누나를 만났다. 누나는 장씨에게 포로수용소에서 고향에 가지 않고 남쪽에 남은 것, 홍성에 정착한 것에 대해 잘했다고 칭찬했다. 누나는 그 후 미국으로 이민 가서 고인이 됐지만 남쪽에 남은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칭찬해준 말을 오랫동안 잊지 않고 있다.

남쪽의 황해도민들은 해마다 10월 첫째 주일 강화도 평화전망대에서 망향제를 지낸다. 장백일씨는 임진강 건너에 펼쳐진 고향 마을에 북한군 초소가 있는 것을 보며 가슴이 뭉클하고 만 가지 회상이 오갔다고 말한다. 홍성읍에서 노년을 보내는 장백일씨는 남북정상회담, 북미정상회담 텔레비전 뉴스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시청한다. 정전협정 65주년, 해방 73주년을 맞아 장백일씨가 염원하는 ‘종전과 평화’는 보통 사람들이 쉽게 말하는 그 말과 무게가 달랐다.
“전쟁은 무조건 안 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