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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스터 권미림의 커피 인물사<10>/ 사르트르 - 커피 앞에서 써내려간 실존(實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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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스터 권미림의 커피 인물사<10>/ 사르트르 - 커피 앞에서 써내려간 실존(實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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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8.10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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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미림<커피인문학 강사>
▲ 권미림<커피인문학 강사>

여기, 서른 살 청년 로캉탱이 있다. 프랑스 부빌에 사는 그는 늘 보던 마로니에 앞에서 문득 구토를 느낀다. 존재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 때문이다. ‘모든 사물은 이름이나 의미를 통해 존재한다.’ 그것이 그가 생각하는 사물의 존재 방식이었다. 책상은 책상으로서의 용도를 지닐 때, 의자는 의자로서의 의미를 가질 때 비로소 그들은 존재한다. 그러나 그 날 마로니에 앞에서 그가 깨달은 것은 굳이 뿌리라는 이름을 가지지 않아도, 그러니까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따지지 않아도 까맣고 딱딱한 덩어리 그 자체로 이미 뿌리는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사르트르의 소설 <구토>는 그렇게 탄생했다. 딱딱한 덩어리 그 자체로 뿌리가 존재하듯 인간 또한 목적이나 의미 없이 그저 생명 그 자체로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 그러기에 인간에겐 무한한 자유가 있고 그 자유를 토대로 인간 스스로 선택하고 노력하여 삶의 본질을 완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름하여 실존주의. 인간은 그가 되려는 것 외에 그 어떤 것도 아니라는 이 사조는 사르트르를 중심으로 들불처럼 번져갔다.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대, 신은 전쟁의 참혹함을 외면했으므로 신을 대신해 인간 스스로 삶의 가치와 행복을 완성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선구자의 삶은 고달프다. 사상을 퍼뜨리고 그 사상 때문에 논쟁의 중심에 서야 하는 철학자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기에 그는 카페를 등에 업고 공론을 시작했다. 계급장을 떼고 만나는 카페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드러낼 수 있는 실존의 산실이었다. 거기서 그는 읽고 쓰고 마시고 사랑했으며 사상을 키웠다. 생제르맹 거리의 카페 되마고에서 그는 커피와 더불어 글을 썼고 추위를 피해 옮겨 간 카페 드 플로르에선 동반자 보봐르와 함께 교감의 기쁨을 나누었다. ‘플로르에의 길은 자유에의 길’ 이라는 그의 찬사는 어쩌면 카페가 아닌 보봐르를 향한 상찬일 수도 있었다. 사랑하되 구속하지 않고 사상은 나누되 육체는 나누지 않는 두 사람의 관계는 계약결혼이라는 파격의 형태로 이어지며 실존주의를 경험하러 온 이방인들에게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되어주었다.

문학에 등급을 매길 수 없다며 노벨 문학상을 거부한 사르트르.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 C(choice)’라는 말로 선택의 중요성을 강조한 그는 선택이야말로 인간이 가져야 할 최고의 덕목이며 사물의 참모습 앞에서 올라오는 구토 또한 인간이 누려야 할 최상의 경지임을 힘주어 역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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