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고장 서산지역에는 태조 이성계의 왕사였던 무학대사와 관련된 설화들이 많이 전해온다. 전국적인 관광지 간월암은 무학대사가 창건했으며, 이곳에서 공부하던 중에 홀연히 달을 보고 깨우쳤다고 하여 간월암(看月庵)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더욱이 서산 지역에는 간월암 이외에도 무학대사가 탄생한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런 이유인지는 몰라도 무학대사의 탄생유래담이 서산지역에 유달리 많이 전해온다.
무학학대사가 탄생했다고 전해오는 장소는 ‘쑥당터’라는 곳이다. 서산시 인지면 애정 1리에 있는 마을인데, 이곳에는 서산시에서 ‘무학대사 기념비’를 세워놓았다.
무학대사기념비에 새겨진 무학대사 관련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무학대사(無學大師)는 1327~1405(고려 충숙황14~조선태종 5)의 도승으로 고려의 국운이 기울 무렵, 태조(太祖)를 도와 조선왕조를 개창한 공으로 태조가 등극하자 왕사(王師)가 된 고승이다.
그러나 타향에서 생계가 매우 어려워 굴을 따서 갈대로 삿갓을 만들어 서주시장에 팔아 연명하였으며, 부친의 부상당한 팔의 상처가 악화되어 치료비로 서주관아에서 관전(官錢) 50냥을 빌려 쓰고 기한 내 갚지 못하자, 관아에서 사령을 시켜 박인일을 끌어오게 하였으나, 마침 집에 없자 만삭이 된 채씨 부인을 대신 데리고 가던 중, 인지면 애정리에 이르러 산기가 있어 길옆 우물가에서 아기를 낳으니, 그가 무학이다. 1327년(충숙왕 14) 구월 이십일이다. 미련한 사령들이 산모를 끌고 가려하자 아기를 우물 주변 아늑한 곳에 뉘고 쑥을 뜯어서 덮어주고 관아로 끌고 갔다.
부인이 오는 도중에 해산한 사실을 안 군수가 사령을 꾸짖고 이방을 시켜 산모를 가마에 태우고 아기 있는 곳에 가보자, 학(鶴)이 아기를 품고 있다가 날아가 인지면 모월리 고개 위로 춤을 추며 사라졌다. 그래서 이 고개를 학돌재라 불렀고 아기 이름을 무학(舞鶴)이라 하였는데 뒤에 불명(佛名)으로 무학(舞鶴)이라 했다. 그리고 이곳을 쑥댕이라 하고 그 우물을 애정(艾井), 그 동리명을 애정리(艾井里)라 하였다.
서주군수는 박인일이 박서장군의 후손이며 왜구를 잡은 사실을 알고 무명 두필과 쌀 다섯 말을 산모에게 보내고 관전 50냥은 자기 봉급에서 갚아주었다. 부친 박인일이 부상당한 팔의 병세가 악화되어 사망하니, 간월도 주봉(主峯)에 묻고 부인은 세 살 된 아기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대사는 18세에 경기도 양평군 용문사에 들어가 소지(小止) 선사를 스승으로 심법을 배우고 뒤에 도승 나옹(儺翁)과 지공(志空)화상의 법을 받고 태조 왕사가 되었다가 1405년 79세로 입적하였다. 왕명으로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전불심인 변지무애 부종수교 홍리보제 도대선사 묘엄존자(大曹溪宗師 選敎道摠攝 傳佛心印 辯智無碍 附宗樹敎 弘利普濟 都大禪師 妙嚴尊者)라는 시호를 주었다.
바로 이곳이 무학대사의 탄생지라고 예부터 전해오는 곳으로 대사의 기념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