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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역사인물축제 특집<1>/ 홍성역사인물의 특징과 공통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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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역사인물축제 특집<1>/ 홍성역사인물의 특징과 공통점
  • 이번영 기자
  • 승인 2017.09.14 08: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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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와 타협 않는 삶 … ‘홍성정신’으로

홍성 역사인물들은 일신의 안일과 영달을 멀리하고 나라와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이들의 ‘지조’를 ‘홍성정신’으로 받아드려야 한다는 생각들이 공유되고 있다. 그들을 따라가지 못하는 오늘의 현실에 대한 반성과 희망이기도 하다. 여섯 인물들의 지조있는 삶 그리고 홍성과 관련된 삶을 그려본다. <편집자 주>

▲ 1964년 9월 25일밤 풀무학교 뒷산 무대에 주민 1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삼문이 지조를 지킨 정치사극 ‘성삼문’을 공연한 풀무학교 학생들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불법 쿠데타에 저항한 최영과 성삼문

최영은 고려 말에, 성삼문은 조선 초기에 불법적인 쿠데타에 목숨을 걸고 저항하다 희생된 대표적인 지조의 인물들이다.

1316년에 홍성군 홍북면에서 태어난 최영은 고려말 연속된 전란 속에서 나라를 지켰다. 고려 정부에서 최영은 이성계보다 권세가 강했다. 같이 왜구를 무찌른 이성계와 사이도 좋았다. 그런데 우왕과 최영의 요동 정벌에 반대한 이성계가 출동 나갔던 위화도에서 돌아와 권력을 독차지하고 최영을 참수했다.
최영은 마지막 순간까지 비굴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당당했다. 1388년 12월 순군옥에서 참형 직전 “내가 평생 탐욕의 마음을 가졌다면 무덤 위에 풀이 날 것이오 그렇지 않다면 풀이 나지 아니하리라”고 말했다. 그후 경기도 고양 그의 무덤에는 풀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우리 역사에서 높이 평가받는 것은 강직하고 청렴한 삶이 교훈적이며 모범을 보여주고있기 때문이다. 그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유훈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말은 오늘날 까지 우리 국민 전체에게 청렴결백한 삶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최영장군이 참형 당한지 30년 후에 그의 고향에서 성삼문이 태어났다. 학문을 하는 성삼문은 강직하고 청렴한 최영이 쿠데타 집권 세력에 의해 부당하게 희생당한 역사를 잘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도 비숫한 운명을 맞았다. 수양대군의 쿠데타 2년 후인 1456년 성삼문 등 13명의 중신들과 함께 세조를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하려다 발각돼 처형을 당했다.

세조는 세종대왕과 함께 한글 창제에 깊이 관여한 집현전 학자 성삼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공신에 명하는 등 많은 애를 썼다. 그러나 허사였다. 고문당할 때 달궈진 인두가 식었으니 더 달궈오라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세조가 “네가 나의 녹을 먹으며 어찌 나으리라고 하느냐”고 묻자 “나는 그대의 신하가 될 수 없다. 그대가 준 녹은 한톨도 먹지 않았으니 나의 집에 가서 보라”고 대답하였다. 집에 가보니 세조에게서 받은 곡식이 그대로 쌓여 있었다고 한다.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의 불의한 현실과 타협하지 않은 정신과 정치 이념은 절의파 사대부들의 의리정신의 바탕이 되었다.

▲ 2014년 홍성역사인물축제 홍주동헌 앞에서 독립만세운동을 한 만해 한용운 뮤지컬 연극공연을 했다.

한성준·한용운·김좌진·이응노

같은 시대 같은 지역에 살았다

1875년 갈산면 신안리에서 태어난 한성준은 옆 마을 예산군 복당리 들판 가운데 넓은 집을 마련, 마당가 버드나무를 이용해 줄타기를 하며 춤공연을 했다. 당시 살았던 마을 노인들에 의하면 공연은 자주 있었으며 많은 인파가 몰렸다고 한다. 인파 가운데에는 소년 김좌진이 있었을 수도 있다. 1889년생인 김좌진은 한성준보다 열네살 아래다. 김좌진이 태어난 갈산면 행산리와 한성준이 태어난 갈산면 신안리 그리고 복당리는 직선거리로 2km 쯤 떨어진 동향이다. 18세에 30여명의 노비문서를 불사르고 전답을 나눠주며 호명학교를 세운 김좌진은 단순한 무장이 아니라 민족의 얼이 담긴 전통문화에도 무관심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전국을 유랑하며 사라져가는 우리춤과 가락을 모아 새로운 춤을 만든 한성준이다.

한성준과 김좌진은 한용운이 봇짐을 메고 강원도 백담사로 떠났다는 소식을 접했을 것이다. 1879년생인 한용운은 한성준보다 네 살 아래며 김좌진의 10년 선배다. 한용운이 태어나 살았던 결성면 성곡리 박철마을은 김좌진 집에서 언덕 2개를 넘머 7km 떨어져 있다. 옛날에는 먼 거리가 아니다. 한용운은 18세에 출가했으며 25세에 돌아왔다 또 나간다. 한용운이 두 번째 집을 나갈 때 한성준은 29세로 한참 공연하던 시기다.

이렇게 같은 시대, 같은 홍성지역에서 태어난 이들은 우리나라 항일운동사의 우뚝 솟은 인물들이 된다. 한용운은 전국민이 존경하는 독립운동가, 시인, 불교 개혁 사상가가 됐다. 김좌진은 대한독립군총사령관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을 바쳤다.

1904년에 홍북면 중계리에서 태어난 이응노는 열다섯살 위인 김좌진을 비롯해 한용운, 한성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으며 자랐을 것이다. 예산군 덕산면 낙상리로 이사간 이응노의 집과 덕산면 복당리로 옮긴 한성준의 집은 이웃 마을이다.

한성준이 서울로 올라가 1934년 조선무용연구소를 차리고 35년에 부민관에서 한성준무용공연회를 열던 해 이응노는 일본미술협회전에 풍족을 출품 입선했다. 31년에는 조선미술전람회에 청죽을 내놓아 특선을 받았다. 홍성의 걸출한 문화 예술가 두 사람이 같은 시기 서울에서 분야가 다르지만 왕성한 예술활동을 했다. 한성준은 해방 직전 세상을 떠나고 이응노는 해방 후 프랑스로 건너가 세계적인 화가가 됐으나 남북 분단 이념 대립의 희생으로 조국에 돌아오지 못한 채 외지에서 마감했다.

홍성역사인물축제가 진정한 의미를 가지려면 홍성의 하늘 아래 홍성의 산과 들판에서 꿈과 기개를 키우며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던 선열들의 삶을 이어받아 홍성정신으로 승화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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