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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길 주변의 숨겨진 이야기/ 서산시 음암면 유계리, 정순왕후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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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길 주변의 숨겨진 이야기/ 서산시 음암면 유계리, 정순왕후 생가
  • 김정헌<동화작가·구항초등학교장>
  • 승인 2017.04.11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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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화꽃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 정순왕후 생가(서산시 음암면 유계리)
우리고장 서산시 음암면 유계리는 조선시대 제21대 영조임금의 계비인 정순왕후(1745년~1805년)가 태어난 마을이다. 정순왕후는 경주 김씨 김한구 씨의 딸이며 어릴 때부터 남달리 총명했다고 한다. 영조의 정비인 정성왕후가 승하하자 두 번째 왕비로 책봉되었다.

정순왕후가 왕비로 간택될 때의 일화가 재미있게 전설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전국에서 왕비 후보에 오른 재상가의 처녀들이 선을 보기 위해 궁궐 안으로 모였다. 궁궐의 큰 방에는 처녀들의 아버지 이름을 써놓은 방석이 가지런하게 놓여있었다. 안내하는 관원의 지시에 따라서 처녀들은 일제히 방석에 앉았다. 그런데 김 규수는 방석 위에 앉지 않고 방석 옆으로 비켜 앉았다. 이를 의아하게 여긴 관원이 이유를 물었다. 김 규수가 대답하기를 “자식 된 도리로서 아버지의 존함이 적힌 방석 위에 앉는 것은 큰 불효입니다. 어떻게 감히 아버지의 존함이 적힌 방석 위에 앉을 수가 있겠습니까?” 대답을 들은 관원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왕비로 간택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지혜를 시험하는 과정이 있었다. 이 과정은 왕비로 간택되는 관문이기도 했다.

관원의 첫 번째 질문은 “이 세상에서 가장 높고 넘기 힘든 고개가 무엇인가?”였다. 모든 처녀들의 대답은 “백두산 고개요” “한라산 고개요” “계룡산 고개요” 등으로 대답했다. 김 규수만은 “보리 고개입니다”하고 대답했다. 보리 고개란, 봄에 곡식이 떨어져서 보리가 익을 때까지 굶으며 참아야 하는 시기를 높은 고개에 비유하여 만든 단어다. 보리 고개야말로 먹을 것이 없어서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배고프게 살던 시절을 가장 잘 대변하는 단어인 것이다.

관원의 두 번째 질문이 이어졌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은 무엇인가?”였다. 모든 처녀들이 “장미꽃입니다” “국화꽃입니다” “백합꽃입니다” 등으로 대답했다. 김 규수의 대답은 “목화꽃입니다”였다. 다른 꽃들은 아무리 아름다워도 보는 것으로 만족할 뿐이었다. 목화꽃이 비록 외모나 향기는 뛰어나지 않으나 따스한 솜과 실을 제공하여 사람들의 옷과 이불이 되어주므로 이보다 더 아름다운 꽃이 어디에 있겠느냐는 대답이었다. 참으로 속이 깊고 지혜로운 대답이었다.

관원의 세 번째 질문이 이어졌다. 세 번째 질문은 “이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은 무엇인가?”였다. 다른 처녀들의 대답들은 “물입니다” “사람의 정입니다” 등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김 규수만은 “사람의 마음입니다”하고 대답했다. 다른 것들은 그 깊이를 쉽게 잴 수 있으나 사람의 속마음은 그 깊이를 쉽게 알아내기가 어렵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관원의 마지막 질문이 이어졌다. 마지막 질문은 “지금 우리가 앉아있는 이 집의 기와지붕에 골이 몇 개나 되느냐?”는 것이었다. 모든 처녀들이 밖으로 나가서 기와지붕의 골을 세어보느라고 부산했다. 하지만 김 규수만은 밖으로 나가지 않고 방안에 앉아서 답을 맞히는 것이었다. 관원이 신기해서 “어떻게 방안에 앉아서 답을 맞힐 수 있느냐?”고 물었다. 김 규수의 대답인 즉 “비가 올 때 기와지붕 골을 타고 낙숫물이 떨어져서 땅바닥이 패여 있습니다. 땅바닥에 패여 있는 숫자가 기와 골의 숫자와 같으므로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알아낼 수가 있었습니다”라고 했다. 관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오, 참으로 지혜롭고 총명한 처녀로구나”라고 감탄하며 왕비로 추천하였다.

이처럼 총명하고 지혜가 뛰어났던 김한구씨의 딸은 여러 가지 시험을 통과하고 1759년(영조35)에 조선 21대 영조임금의 왕비가 된 것이다. 당시에 영조의 나이는 66세였으며 정순왕후는 15세였다. 조선시대 개국 이후에 왕과 왕비의 나이 차가 가장 많은 혼인이었다. 심지어는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와 며느리인 혜경궁홍씨보다도 정순왕후의 나이가 10살이나 어렸다.

정순왕후가 왕비로 책봉 된 후에 상궁이 옷을 만들기 위해 몸의 치수를 잴 때의 일화도 있다. 상궁이 몸의 뒤쪽을 재기 위해서 잠시 돌아서달라고 하자 단호한 어조로 “네가 돌아서면 되지 않느냐”고 추상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도 왕비의 체통을 중시했던 대담한 면모를 알 수 있는 일화이다.

정순왕후는 남편인 영조의 총애를 받았지만 슬하에 자녀를 두지는 못했다. 영조임금의 나이가 이미 노년기에 접어들어서 자녀를 잉태하기에는 힘들었을 것이리라.

남편인 영조가 1776년에 승하하고 손자인 정조가 즉위하자 왕대비(王大妃)로 승격되었으며, 1800년에 정조가 승하하고 증손자인 순조가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대왕대비(大王大妃)로 승격되었다. 이때 정순왕후는 왕실의 제일 높은 대왕대비(大王大妃)가 되어서 4년 동안 수렴청정을 하였다. 1805년 2월 11일에 61세를 일기로 경복궁 교태전(交泰殿)에서 승하하였으며,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에 위치한 원릉(元陵)에 영조와 함께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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