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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그립습니다> 김월비 여사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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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그립습니다> 김월비 여사 별세
  • 윤두영 기자
  • 승인 2017.03.22 18: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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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세(來世)엔 달 아닌 태양으로 태어나소서!

 
김태영(前 광일화물 대표)의 모친(故 김 月非 여사)께서 지난 3월 14일 영면했다. 향년 89세.

광천 삼성장례식장에서 장례절차를 마치고, 16일 구항면 마온리 선산에서 안장식을 가졌다. 유족으로 제3대 도의원(1960년·신민당)을 역임한 김응주(89) 夫君, 김태영 子 박승옥 子婦, 김정애 女, 그리고 6명의 손주와 4명의 증손주가 있다.

장례절차를 마친 지난 17일, 태영 씨를 만났다. 고인이 되신 그의 어머님 삶의 이야기를 듣기 위한 자리였다. 슬픔과 피곤이 가시지 않은 그에겐 좀 무리한 부탁의 자리였다.

“어머님의 삶 90 평생은 그야말로 파란만장의 역사였습니다”라고 말문을 연 태영 씨의 이야기를 순서와 격식 없이 기술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말한다. ‘자신의 삶을 소설로 쓰면, 몇 권의 책은 될 거라고.’ 틀린 말이 아니다. 누구나 희로애락의 삶을 살게 마련이니까 말이다.

김월비 여사. 그녀는 평안남도 강동군(평양 인근)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강동군 최대 지주였다. 그 후광의 덕이었을까? 그녀의 백부(김대우)는 경북지사를, 숙부(김호우)는 충남경찰청장을 역임했었다. 요샛말로 그녀는 금수저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다. 성년이 되며 인근에 살고 있던 김응주 청년과 혼약도 했다. 기쁨(喜)과 즐거움(樂)만 있을 것 같던 그 때까지의 그녀의 삶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고되(怒)고 슬픈(哀) 삶이 시작된 것이다.

1945년 해방이 되며, 그녀의 가정엔 폭풍이 몰아쳤다. 일제잔재와 지주 청산의 폭풍이었다. 폭풍을 견뎌 낼 수 없다는 판단에, 온 가족은 1948년 서울로 내려왔다. 다소의 현금과 금품을 가지고 왔지만, 난리 속에 날려 버렸다. 난리 속에 혼약은 까마득히 잊어 버렸다.

하지만 백년가약의 인연은 이어지게 마련이었다. 서울 남대문 시장에서 기적같이도 약혼자를 만났다. 1948년 12월이었다. 약혼자 김응주 청년도 같은 시기 남한으로 내려왔던 것이다. 그는 광천에 정착하고 있었다. 그의 고모가 광천의 내로라하는 명문가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만난 그해, 결혼했다. 그녀의 광천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남편 김응주는 교사였다. 장곡초등학교와 광흥중학교에서 4년 간의 교편을 잡았다. 그 후 선친이 일구어 논 사업을 이어 받았다. 제재소와 운수업이었다. 사업이 제자리를 잡기까지, 그녀의 내조는 시작됐다. 힘든 노동의 내조였다. 제재소 인부들, 화물차 기사 및 조수들의 끼니와 뒷바라지를 도맡아 해결해야 했다. 그 뿐이 아니었다. 정치에 뛰어든 남편의 선거운동과 뒷바라지도 해야 했다. 그 결과 남편 김옹주는 31세 최연소 나이로 제3대 도의원에 당선됐었다. 정치에 입문한 남편은, 1971년 박정희·김대중 후보가 맞붙은 대통령선거도 관여했다. 신민당 김대중 후보의 홍성·청양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아 뛰었다. 남편은 홍성의 대표적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인 아내의 심신은 산란하고 고달프다. 강동군 지주의 외동 딸이 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해냈다. 그렇게 광천에서 터를 잡았다. 그리고 자녀를 키우고 남부럽지 않게 살다 운명했다.

운명하며, 이승에 남은 한은 없었을까? 필자의 의문이다. 고인의 이름을 되새기며 갖게 된 의문이다. 月非, 달이 아니란 뜻인가? 달이 아니면, 태양이길 바란 작명인의 바램이 있었을까? 그런 바램에 고인이 동의한다면, 내세엔 남자로 태어나길 빌어볼까? 고인의 명복도 함께 빌며 부질없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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