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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길 주변의 숨겨진 이야기/ 예산군 봉산면 화전리 석조사면불상(石造四面佛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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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길 주변의 숨겨진 이야기/ 예산군 봉산면 화전리 석조사면불상(石造四面佛像)
  • 김정헌<동화작가·구항초등학교장>
  • 승인 2017.02.20 15: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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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유일 사면불상 … 제해권 부활 염원 담아

▲ 화전리 사면불상.
▲ 사면불상의 주불로 추정되는 남쪽면 여래좌상 모습.
우리고장 예산군 봉산면 화전리 뒷산 불당골이라 불리는 산언덕에 보물 794호인 석조사면불상(石造四面佛像)이 서있다. 이 사면불상은 자연석의 동서남북 4면에 불상을 조각한 것으로서 백제시대인 6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화전리 석조사면불상은 오랜 세월동안 땅속에 묻혀있던 것을, 1983년에 산을 개간하는 과정에서 산주인에 의해 발견·신고되면서 문화재연구소가 발굴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듬해인 1984년에는 사면불상의 가치와 중요성이 인정되어 우리나라 보물 제794호로 지정되었다.

화전리 석조사면불상은 백제의 유일한 사면불상이면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석조사면불상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한 백제시대 불상조각기법의 흐름을 한눈에 살펴 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유적으로 평가된다고 한다.

화전리 석조사면불상이 지금은 보호각 속에서 안전하게 보호되고 있지만 오랜 세월동안 산비탈에 방치되었던 관계로 원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곳곳이 심하게 파손되었다. 발견 당시에는 옆으로 쓰러진 채 반쯤 땅속에 묻혀있었는데 땅위로 보이는 부분은 심하게 파손되었으며 땅속 부분은 비교적 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이었다고 한다.

▲ 동쪽면 여래입상.
사면불상의 가장 넓은 면인 남쪽에는 주불(主佛)로 보이는 여래좌상이 조각되었으며, 나머지 3면에는 여래입상이 조각되어 있다. 사면불상의 곳곳이 심하게 파손되어 원형을 많이 잃어버렸지만, 남아있는 모습만으로도 백제의 고도로 발달한 조각기법을 한눈에 엿볼 수 있다.

석조사면불상이 서있는 화전리 뒷산은 산이 높다거나 산세가 특별해 보이지도 않는 평범한 야산이다. 이처럼 평범한 야산에 백제시대의 중요한 불교유적으로 평가되는 우수한 석조사면불이 서있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우리나라 미술계의 권위자이며 예산이 고향인 최완수(간송미술관한국민족미술연구소장) 선생은 화전리 석조사면불상이 이곳 예산에 세워진 배경에는 6세기경의 한반도 정세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정책으로 서기 475년에 백제의 수도였던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사망하면서 백제는 큰 위기를 맞이하였다. 백제는 한강 유역의 지배권을 상실하게 되었고 수도를 공주로 천도할 수밖에 없었다. 백제는 공주로 수도를 옮긴 후에 고구려에 빼앗긴 한강유역의 제해권을 되찾기 위해 아산만을 새로운 전략요충지로 삼아서 해상세력을 키워나갔다. 그 중심 장소가 바로 바닷물이 육지 깊숙하게 들어와 있는 내포 지역이었다.

▲ 북쪽면 여래입상.
특히 내포 일대는 가야산을 끼고 있으며 바다가 깊숙하게 들어와 있어서 숲이 우거지고 물산이 풍부하였다. 이곳이야말로 백제의 해상주력부대를 양성하는 중심지로 안성맞춤이었다. 이곳에 백제의 수군 본영을 설치하고 배를 건조하며 국력회복에 온 힘을 기울였을 것으로 연구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특히 백제의 동성왕에 이어서 임금에 오른 제24대 무녕왕(501년~523년)은 해상세력을 길러내어 고구려와 끊임없는 각축전을 벌이면서 서해 북부의 제해권을 되찾은 임금으로 알려지고 있다. 해양강국의 면모를 되찾아놓은 무녕왕은 백제의 옛 땅을 회복하기 위해 과감한 북진정책을 추진하다가 62세에 숨을 거두었다.

무녕왕이 죽고 아들인 성왕(聖王·523년〜553년)이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성왕은 아버지 무녕왕이 살아생전에 심혈을 기울여 왔던 일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무녕왕 사후에 아버지의 추복(追福·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어줌)을 위해 해상세력 복원의 중심지였던 장소에 백제 최초의 사면석불을 조성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백제시대에 예산의 봉산면 주변은 아산만과 잇닿아 있는 바닷가였으며 백제 해상세력 부흥의 중심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이다.

▲ 서쪽면 여래입상.
최완수 선생은 화전리 사면석불 남쪽 여래좌상의 주인공은 바로 무녕왕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의 아들 성왕이 아버지 무녕왕의 모습을 새겨놓고 평생동안 펼쳤던 해상세력 복원을 기념함과 동시에 백제의 영원무궁한 발전을 기원했던 것이다. 화전리 사면석불의 주불인 여래좌상이 바라보는 방향은 남쪽 아산만이다. 무녕왕은 부처가 되어 백제 해상세력 복원의 꿈을 키웠던 요지에 앉아서 평생의 꿈과 땀이 배어있는 아산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사면불상 주불인 여래좌상과 나머지 여래입상의 모습이 많이 파손되어 원래모습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발굴 당시에 수습된 손의 형태가 시무외인(施無畏印)과 여원인(與願印)을 취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손 모습은 부처님이 중생들의 두려움과 우환과 고난을 소멸시켜주고 중생들의 소원은 모두 들어준다는 대자대비의 덕을 상징한다.

이와 같은 정황들을 종합해 추정해볼 때, 화전리 사면불상은 무녕왕이 그토록 염원했던 백제부흥의 소원을 담고 있는 것으로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백제인들의 모든 근심 걱정을 없애주고, 백제의 영원무궁한 발전과 백성들의 안녕을 바라는 간절한 염원이 담긴 의미가 화전리 사면불상에 담겨있다고 풀이해도 무방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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