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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향인 인터뷰> 정세훈 시인·리얼리스트100 상임대표·인천민예총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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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향인 인터뷰> 정세훈 시인·리얼리스트100 상임대표·인천민예총 이사장
  • 윤진아 서울주재기자
  • 승인 2016.11.30 17: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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섧고 고달픈 가슴에 피어난 희망

 
소년 노동자, 시인이 되다

출향시인 정세훈(61·사진) 리얼리스트100 상임대표 ·인천민예총 이사장의 문장에는 피와 땀, 빛과 어둠이 고스란히 배어있다. 돈이 없어 진학을 포기해야 했고, 돈이 없어 사랑하는 여자와 헤어져야 했고, 돈이 없어 꿈을 접고 척박한 노동현장을 전전해야 했다. 가난했지만 정직하게 살고자 했고, 고된 삶일지언정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그는 이제 시인이 되어 섧고 고달픈 소시민의 가슴에 온기를 전하고 있다.

녀석이 나보다
부잣집 아들이었다는 것도
학업을 많이 쌓았다는 것도
돈을 많이 벌었다는 것도
그 어느 것 하나 부럽지 않았다
다만, 녀석이
내 끝내 좋아한다는 그 말 한마디
전하지 못했던 그녀와
한 쌍이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적
난 그만
녀석이 참으로 부러워
섧게 울어 버렸다

-정세훈 시 <첫사랑>

장곡면 월계리 고향

장곡면 월계리 안골마을이 고향인 정세훈 시인은 故 정동팔, 이옥금 씨의 4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집 울타리에 흐드러지게 핀 붉은 해당화, 따먹고 싶던 이웃집 앵두나무와 야생딸기 등등 고향집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제가 나고 자란 곳은 월계리 안골마을에서도 외떨어진 산 중턱이었어요. ‘닭잘뫼’라는 곳에 네 가구가 살았죠. 집 모퉁이엔 연고자 없는 묘가 2기 있었는데, 양지바른 곳에 꽃이 아름답게 피었어요. 그곳에서 저보다 한 살 아래 여자아이와 소꿉장난하며 놀았지요. 배고프던 어린 시절 먹었던 옥수수 대, 보리수, 칡뿌리가 그립네요.”

소나기 한 차례 몰고 간 뒤에
옥수수 한 뼘쯤씩 자라고 있을까
옥수수 대 씹어 단물 빨던 나
잡초처럼 커온 내 고향 월계리
사모님이 된 소꿉친구 여자아이

내 등에 엎히어 수줍이 건너던 홍수 난 시냇물은
옥수수 밭 지나 산모퉁이에서
아직도 여전히 흐르고 있을까

-정세훈 시 <소나기>

아버지는 탄광에서 탄을 캐는 광부였다.
“매사에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했던 아버지는 탄광에서 일하고 와서도 얼마 안 되는 농지지만 농사일도 열심히 하셨어요. 일상이 고단해서였는지 음주도 즐겨하셨죠. 때론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하실 때도 있어서, 아버지 마중 나가 부축하다가 함께 넘어지곤 했어요.”

어머니는 6·25 때 두 자식을 잃은 충격으로 속병을 앓았다.

“어머니의 속앓이가 깊어 아편주사로 다스렸는데, 아버지가 탄광에서 받은 노임을 몽땅 털어 아편을 살 때도 있었어요. 그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 진학을 포기하고 상경했습니다.”

아버지는 늘 자신처럼 되지 말라고 하셨지만, 소년도 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정세훈 시인은 반계초등학교(19회), 양성중학교(6회)를 졸업하고 출향해 열일곱 어린 나이에 영세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반계초 19회, 양성중 6회

정세훈 시인은 1989년 <노동해방문학>을 통해 문단에 나왔다. 공장에서 얻은 진폐증으로 30여 년간 투병하다 2011년 무렵 건강이 호전되면서 작품활동을 재개했다. 시집 <손 하나로 아름다운 당신>, <맑은 하늘을 보면>, <저 별을 버리지 말아야지>, <끝내 술잔을 비우지 못하였습니다>, <나는 죽어 저 하늘에 뿌려지지 말아라> 등이 있다.

2013년 출간한 시집 <부평 4공단 여공>과 관련해 평단에서는 “죽음의 고비를 넘어선 그의 시에는 푸성귀 같은 생기가 있다. 섧고 고달프고 분한 고비에서도 진실함을 잃지 않고자, 미움에 발목 잡히지 않고자 그가 어떻게 애쓰고 있는지는 그의 시집 여기저기에 아무것도 아닌 듯이 피어나 있다. 얼마나 힘센 소박함인가. 얼마나 무서운 선량함인가”라고 평했다.

▲ 10월 17일 ‘예술인 블랙리스트’ 관련 성명서를 발표한 정세훈(왼쪽 네 번째) 시인.
고달픈 소시민 예술로 위로할 것

정세훈 시인은 현재 ‘리얼리스트100’의 상임대표와 인천민예총 이사장, 한국작가회의 이사를 맡고 있다. 리얼리스트100은 현장 중심의 실천을 통해 반자본주의적 문화와 문학운동의 토대를 만들려는 작가와 창작자들이 만든 단체로, 현재 전국에서 700여 명의 회원이 활동 중이다. 인천민예총은 진보적 예술을 지향하는 200여 명의 인천지역 예술인들로 구성된 단체로, 최근 지역 시민단체와 함께 ‘인천 평화의 소녀상’을 제막하며 일본 위안부 문제를 다시금 세상에 알렸다. 우리 사회의 인권사각지대와 다양한 노동현장에서 시낭송과 연대발언 등의 활동을 펼치고 있는 정세훈 시인은 “소시민과 함께 호흡하고 그들의 삶 속에서 신바람 나는 예술활동을 작가들이 펼쳐야 한다”고 강조한다.

초유의 국정농단 사건이 표면으로 나타나기 전이었던 지난 10월 중순, 현 정권이 9473명의 ‘예술인 블랙리스트’를 만든 게 알려져 파문이 일었다. 정세훈 시인은 리얼리스트100 회원들과 함께 10월 17일 ‘무슨 칼을 들이대도 문화예술은 꺾이지 않는다’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하고 광화문광장에서 토요 촛불집회를 진행해오고 있다.

지난 11월 4일에는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100여 명의 문화예술가와 함께 ‘우리 모두가 블랙리스트 예술가다. 박근혜 퇴진 문화예술인 시국선언’을 했다. 이번 시국선언엔 7449명의 문화예술인과 288개 문화예술 단체가 참여했다.

정세훈 시인은 11월 29일 민족문제연구소와 한국작가회의 산하 자유실천위원회가 긴급 개최한 ‘친일문인 기념문학상 반대 토론회’에 주제발표 토론자로 참여했다. 정세훈 시인은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71년이 지났지만, 친일문학 문제는 우리에게 과거사가 아니고 현재의 문제”라며 친일문인들이 득세하는 풍조를 비판하고 “최소한의 상식과 정의에 따른 작가정신을 바로 세워야 하는 사명이 있다. 사고할 수 있는 인간으로서 가장 기초적인 능력인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하는 이들은 이미 문인이 아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 11월 29일 친일문학상 반대 토론회에 나선 정세훈(오른쪽 세 번째) 시인.
신작 시집 <몸의 중심> 출간

죽을 뻔했다가 살아난 삶이니, 공공선(公共善)에 헌신하며 살아야 한다는 각오는 생의 매 순간 목숨처럼 지켜나가고 있다. 12월 발간 예정인 신작 시집 <몸의 중심>이 출간되고 금전이 생긴다면, 그 금액이 얼마 되지 않겠지만 비정규직 해고노동자들을 위해 쓸 예정이다. 앞서 낸 시집 <부평 4공단 여공> 출간 때도 그랬다. 시인으로서, 사고할 수 있는 한 명의 인간으로서 내야 할 목소리는 앞으로도 용기 있게 낼 계획이다.

“저는 제 약력에 고향이 홍성이라는 사실을 꼭 명기합니다. 제 고향 월계리 안골의 품성이 제 문학의 품성이 되었거든요. 그동안 지켜봐온 홍성신문은 참 고운 품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해요. 옳은 것은 옳다고 말하고 틀린 것은 틀리다고 전하는 용기, 약자를 대신해 나서는 자세야말로 고운 품성이 아닐까요? 지금껏 걸어온 28년처럼, 앞으로도 초심을 잃지 않고 홍성군민의 자랑스러운 언론이 되어주길 믿고 또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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