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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정/ 김미경<청운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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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정/ 김미경<청운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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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10.20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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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 나온 여자’와 ‘말 타는 여자’

 
프란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는 <역사의 종말>에서 인간은 뿌리에서 부터 ‘타인지향형’이라고 했다. 인간의 동물적 요소, 생존을 충족시키는 것은 물질적이고 경제적인 요소이다. 그리고 인간의 사회성을 충족시키는 것은 ‘인정받는 것’이다. 인간은 먹고사는 것으로만 만족하지 못하고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인정욕망’을 갖고 있다. 자신의 우월성을 입증하려는 ‘우월욕망’과 남들만큼 인정받고자 하는 ‘대등욕망’이 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더 나은 지위 혹은 계급으로 우월성을 얻으려는 시도는 일상적이다. 높고 낮음의 지위는 차별적 에너지를 얻는다. 에너지의 힘은 권능의 힘을 부여한다. 타인을 지배할 힘을 갖고 그 영향력을 행사하는 권능을 얻는 것이다. 우월성의 권능은 경제적 프리미엄도 가져다준다. 우월한 지위는 타인으로부터 더 많은 자유를 얻을 수 있고, 타인 위에 군림할 수 있고 더불어 더 많은 이윤을 덤으로 얻을 수도 있다.

영화 ‘타짜’에서 사설 도박판 단속에 걸린 김혜수에게 형사는 “잠깐 감옥에 들어갔다 나오면 된다”고 말한다. 김혜수는 팔짱을 턱 끼고서 “이거 왜 이래. 나 이대 나온 여자야! 어떻게 그런 델 들어가”라고 쏘아붙이는 장면이 있다. ‘이대’ 출신이라는 지위와 그 권능의 아우라를 던진 것이다.

학벌은 우월욕망의 대표적 표상이다. ‘이대’라는 우월욕망의 표상은 타인과 구별 짓는 힘이 있다. 그 우월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경계의 언저리를 쉽게 허락하지 않아야 한다. 쉽게 다른 힘에 굴복되어서도 안 되고, 시장주의적 이윤에 흔들려서도 안 된다. 한 번 흔들리면 ‘이대’의 우월성은 타인의 대등욕망의 먹이거리가 되기 쉽다. 그렇게 된다면, 더 이상 ‘이대 나온 여자’의 권능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대’가 시끄럽다. 겸손한 듯 도도한 우월 욕망자들의 고매함을 뿌리부터 흔드는 일이 발생했다. ‘이대’를 구별 짓는 경계를 쉽게 내주지 않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온갖 정체불명의 무명씨들의 대등욕망을 채워주기 위해 미래 라이프대학이라는 사립문을 열어주려고 했다. ‘이대 나온 여자’들의 우월욕망을 손상하려는 어떠한 시도에도 저항은 생명처럼 타올랐다. 후쿠야마(Fukuyama)가 언급한 것처럼 인간의 역사는 먹고 사는 문제로만 굴러가지 않고 번쩍이는 배지에 불꽃이 뛴다는 사실을 확인한 셈이다.

이번엔 ‘말 타는 여자’가 ‘이대 나온 여자’들 위에 군림했다. ‘이대 나온 여자’는 ‘일반석’에, ‘말 타는 여자’는 교수들과 ‘비즈니스석’을 타고, ‘이대 나온 여자’는 ‘이대 정문’으로 나온 여자가 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성적에 매달리며 무수리처럼 살 때 ‘말 타는 여자’는 말 타고 ‘이대 후문’으로 들어와 공주처럼 대접받았다. 이쯤 되면 ‘이대 나온 여자’는 몸종이 되고 ‘말 타는 여자’는 주인댁 아기씨가 된 것이다. ‘이대 나온 여자’의 권능은 ‘말 타는 여자’의 권능에 굴복되어 아우라를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이대 출신의 아내를 맞은 남편도 우월성의 권능을 느꼈고, 이대 출신의 딸을 둔 엄마도 우월성의 권능을 발휘했다. 그들이 간직했던 연결적 권능이 파괴된다는 것은 동질적 자존감의 훼손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방어는 매우 살아있다. ‘말 타는 여자’의 대등 욕망의 침공은 ‘이대 나온 여자’의 우월 욕망의 방어로 정리되는 듯하다. ‘말 타는 여자’의 엄마와 그 엄마 친구들이 아무리 힘이 세도 ‘이대 나온 여자’의 연결망을 이기기는 힘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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