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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정/ 오종설<홍성제일장로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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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정/ 오종설<홍성제일장로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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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08.25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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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들에도 봄은 온다!

▲ 오종설<홍성제일장로교회 목사>
1912년 5월 25일 조선의 26대 고종황제는 회갑을 맞이하며 궁녀 출신인 복녕당 양귀인을 통해 덕혜옹주를 품에 안게 된다. 일찍이 4명을 공주를 얻었으나 한 살이 되기 전 다 잃게 되었던 고종황제로서는 늦은 나이에 얻게 된 고명딸 덕혜는 한 나라의 임금을 떠나서 한 아버지로서 삶에 기쁨이요 희망 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한일합방이라는 국가적인 수치가 채 가시기전이었고, 일제의 폭압과 매국노들의 득세에 고종 스스로의 자리가 위태한 때에 태어난 덕혜옹주는 황량한 사막에서 얻게 된 오아시스와도 같은 행복, 그 자체였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반증되는 것은 고종께서 덕혜옹주가 보고 싶어서 덕수궁에 들렸을 때 덕혜옹주는 유모상궁에게 젖을 먹고 있을 때 이었다. 이에 유모상궁이 급히 일어나려고 하면 덕혜옹주가 잠에 깰까 하여 가만히 누워 있으라 했으니 황제 앞에서 누워서 알현한 상궁이 역사 속에 또 누가 있었겠는가? 또한 고종께서는 덕혜옹주를 위해서 궁궐에 유치원을 만들어 다니게 할 정도 였다. 그리고 일본으로 보내는 것을 막기 위해서 8살 된 덕혜를 당시 황실에 시종이었던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과 약혼을 시키기 까지 한 것이다. 고종황제의 덕혜옹주를 향한 희망과 사랑은 의문의 죽음으로 끝이 나고, 덕혜옹주는 13세의 나이로 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떠난다. 그리고는 파란만장한 비운의 76년의 생애를 살아가게 된다.

며칠 전 필자는 모처럼 이 비운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의 일생을 다룬 영화를 관람 하였다. 필자의 느낌상 역사적 고증을 통한 영화이겠지만, 관객을 위한 각색이 연출되었음을 감지 할 수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로 하여금 큰 감동을 받은 영화의 한 장면은, 일제에 의해서 징용된 우리 노동자들에게 가서 일본에 협력할 것을 연설하라고 강요받은 덕혜옹주가 일본에 협력하는 연설이 아니라 당시 1926년 개벽지 6월호에 발표되었던 주권을 빼앗기고 고통중에 신음하는 대한제국이 광복하리라는 염원을 담은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를 인용하여 강제 노역에 시름과 고통 중에 있는 노역자들에게 조국으로의 복귀에 대한 희망을 외침으로서 용기를 주는 모습에서 가슴 뭉쿨함을 한없이 느꼈다.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 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위 시가 바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첫 단락이다. 모든 불의는 때가 되면 망하고, 정의는 반드시 승리하게 된다. 당시 일제의 무력과 폭압 속에서 내선일체를 주장하면서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안락을 추구했던 불의 한 자들은 빼앗긴 들에는 봄이 올 수 없다고 생각 했을 것이다. 이런 시를 들으면서 코웃음을 치면 조국의 광복에 부정적 이었을 것이고, 어쩌면 광복을 막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리는 지금 조국 광복 71년을 맞이했지만 미완의 광복 속에 살고 있다. 남북 간의 이념적인 갈등은 여전하며 위험천만한 북한 정권에 핵무기 위협 속에 우리는 사드 배치에 따른 국론 분열과 열강의 자국 이익에 따른 외교 정책은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다시금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상기 시켜 주고 있다. 후세의 역사 속에서 과연 무엇이 조국을 위한 길이었는가를 자신의 이익을 내려놓고 백성과 조국 편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위정자가 되어야 한다. 국민의 혈세를 더 이상 능멸 하려 들지 마라! 이름 없이 산화한 독립운동가들의 헌신을 가볍게 여기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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