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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연재/ 1950년 여름 홍성⑦-홍성의 빨치산 박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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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연재/ 1950년 여름 홍성⑦-홍성의 빨치산 박종숙
  • 이번영 기자
  • 승인 2016.07.20 14: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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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 여인에게 돌을 던질 수 있나?

▲ 이보미 그림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을 탈환했으나 남쪽의 상당수 지역이 아직 인민군 수중에 있던 1950년 9월 말. 홍성군인민위원회 유격대가 결성면 결사대와의 일전에서 승리한 후 홍성읍으로 향했다. 행군 대열이 구항면에 도착할 무렵 홍성읍이 국군의 수중에 들어간 사실이 전달됐다. 유격대를 일단 해산시킨다는 지시가 내려왔다. 전명재 인민위원장은 구항면 오봉리 월산 밑에서 대원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전략적으로 후퇴한다. 이제 서부로 가서 배를 타고 북한으로 간다.”
낙심한 대원들이 우왕좌왕 하며 갈피를 정하지 못했다.

월산 올라간 빨치산 200명

전명재는 대원들을 해산하고 50명을 선발했다. 이제 개인적으로 행동, 살아남아서 가야산에 집결하라고 했다. 사람들은 이들에 대해 ‘홍성의 빨치산’이라고 불렀다. 필자는 이 연재 기사에서 모든 사람을 실명으로 표기하고 있으나 현존하는 4명 만 가명을 쓰고자 한다.

▲ 이보미 그림
1931년 홍동면 대영리에서 태어나 부친을 따라 홍성읍 월산리에서 자란 박종숙(가명)은 홍성여중을 1회로 졸업하고 대전 충남고녀에 들어갔다. 충남고녀는 대덕여중과 대전여중을 통합 승격한 사범학교다. 홍성여중과 충남고녀를 2등으로 졸업한 박종숙은 수재다. 160cm 안팍 키에 당시 미인으로 평가받던 동그란 얼굴에 짙은 눈썹, 복숭아 같은 피부색으로 가는 곳마다 인기를 독차지 했다. 그가 강습과를 졸업하고 집에 와서 교사 발령을 기다리는 중 6·25전쟁을 만났다.

인민위원회로부터 여성동맹 지도자 강습을 받으라는 지시를 받은 박종숙은 대전까지 걸어서 찾아갔다. 그러나 1개월 강습과정을 열흘만에 끝내고 돌아왔다. 그는 대전에서 만해 한용운의 아들 한보국을 만났는데 “전세가 안 좋다, 며칠 후 나는 떠난다. 몸 조심해라”는 이별의 말을 들었다.

박종숙이 홍성에 돌아와 보니 인민군은 하나도 안 보이고 이북에서 온 보위부원만 이런 저런 지시를 하고 있었다. 종숙은 친구 최영혜(가명)와 함께 인민위 유격대에 편입돼 홍성의 빨치산에 선발됐다. 월산 꼭대기 판판한 잔디밭에 모인 빨치산 대원은 200명 가량이었다고 그는 기억한다. 빨치산은 월산에서 가야산으로 이동했으나 3일 만에 하산하며 끝났다.

가야산서 하산, 잡히자 자살 결심

박종숙과 최영혜는 가야산 밑 종숙의 친척집에서 15일 동안 숨어 지내다 발각돼 덕산지서에 수감됐다. 이들은 감방에서 자결을 결심했다. 영혜가 종숙에게 말했다.

“너는 마음이 약해 죽지 못할 거다. 너부터 죽인 다음에 내가 죽을게”

영혜는 치마 끈을 뜯어 종숙의 목을 조이기 시작했다. 종숙이 지르는 소리에 깜작 놀란 경찰이 들이닥쳐 이들의 자결은 실패했다. 영혜는 그로부터 20년 쯤 후 실제 자결한다.


지서장이 종숙에게 자기집 식모로 와서 일할 것을 제안했다. 예쁜 그를 죽음에서 건질수 있는 방안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종숙은 거절했다. 평등한 세상을 만들고 싶은 신념에 찬 그에게 지서장집 식모는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았다.

그들은 홍성 재판소로 압송돼 재판을 받았다. 비슷한 죄목으로 들어온 이들에게 대부분 무기징역이 선고됐으나 종숙에게만 사형이 선고됐다. 그날 저녁 간수가 종숙에게 말했다.

“사형 언도받은 기분이 어때? 이 바보야 사형이 아니고 너도 무기징역이야. 아까 판사 얼굴 봤냐? 니가 이쁘니까 판사가 네 얼굴 표정보려고 장남삼아 사형이라고 말 한 거야”

박종숙은 대전교도소 사상범 방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사범학교 출신인 그는 교도소 내에서 체조를 가르치는 등 모범생활을 했다. 우영순이란 이름의 간수로부터 기독교 신앙 전도를 받은 종숙은 이때부터 믿음이 깊은 기독교 신앙인이 되었다. 무기징역에서 15년으로 감형되고 6년 만에 풀려 나왔다.

경찰 뒷조사 피하려 군인과 결혼했으나 …

21세 꽃다운 나이. 인물이 받쳐주는 그는 서울 백화점 점원으로 취직했다. 부산에 본사를 둔 조선방직회사 서울 사무소 동화백화점 직매장에서 근무했다. 육군 중위 계급장을 단 한 군인이 접근해 왔다. 그 남자와 결혼을 했다. 감옥에서 나온 종숙에게는 홍성경찰서 사찰계 정모 형사가 늘 따라 다니며 행동을 수시로 상부에 보고했다. 이에 질려버린 종숙은 군인에게 시집가면 괜찮을 것으로 생각하고 무조건 그와 결혼했다. 실제 그 뒤로 종숙에 대한 뒷조사는 중단됐다. 그런데, 시집을 가보니 아이 둘을 둔 유부남이었다.
군인과의 결혼생활은 아이 하나를 낳고 헤어졌다. 다른 사람을 만났다. 그도 순탄지 않았다. 1978년 아이 둘을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필자는 2004년 4월 21일 미국 캔자스의 조용한 마을에서 역사의 수레바퀴 밑에 치여 살아온 과거를 잊고 조용하게 지내는 박종숙을 찾아갔다. 유리문 벽 넘어 드넓은 들판이 내려다보이는 거실에서 한나절 내내 박종숙의 드라마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몇 번인가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으며 질문했다.

“친구 영혜는 갔는데 난 이렇게 구차한 삶을 이어왔다우, 우린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민주주의자라구요. 가능하다면 좀 더 평등하게 서로 사랑하며 사는 세상을 바란 것 뿐인데, 누가, 왜, 꿈이 컸던 나를, 우리집을 이렇게 만들었는지 당신은 알고있오?.”

침묵은 길수록 고통

박종숙은 가족에게도 하지 못한 이야기라며 자신이 죽기 전에 글로 쓰지 말 것을 당부했다. 그런데 필자는 12년 만에 그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일부를 글로 옮겨 버렸다. 한국전쟁의 끔찍한 트라우마는 한 사람 만의 이야기를 넘어 수많은 박종숙들이 지나온 터널일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의 나이 벌써 85세. 고통은 침묵이 길수록 더 잊혀지지 않는다. 통일은 소통에서부터 시작점을 찾아야할 것이다. 좌와 우, 남과 북간에, 우선 이웃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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