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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호의달 특별기획 연재②/ 1950년 여름 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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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호의달 특별기획 연재②/ 1950년 여름 홍성
  • 이번영 기자
  • 승인 2016.06.17 15: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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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수탈에 항거하다 보도연맹원 강제가입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남북한에 300만 명의 인명을 희생시키며 끝난지 66년이 됐다. 한국전쟁은 비전투 민간인의 희생이 군인보다 많았다는 점에서 세계 전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전쟁이라고 한다. 6월 원호의 달을 맞아 홍성 사람들은 6·25를 어떻게 겪었으며 민간인은 어떻게 얼마나 희생됐나 정리해본다. 2개월 예정으로 연재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 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을 주제로 만든 영화 ‘레드툼’의 한 장면.
1950년 6월 25일 38선이 열리자 각 지역의 보도연맹원 예비검속이 시작됐다. 홍성보도연맹원 예비검속은 6월 28일이었다는 증언자가 많다.

국민보도연맹(國民保導聯盟)이란 오제도 검사의 제안에 따라 1949년 6월 5일 결성된 반공단체다. 좌익계 정당, 사회단체에서 이탈하거나 전향한 자들에게 사상교육을 시킨다며 만든 단체로 좌익계열과의 투쟁을 선포하며 출발했다. 보도연맹 강령은 북한괴뢰정권 절대 반대, 공산주의사상 배격 등으로 어느 정도 좌익을 척결하는데 성과도 올렸다. 당시 남로당, 인민위원회, 노동조합, 농민단체 등에 가담한 적이 있는 사람, 심지어 한독당원, 일제때 독립운동하던 사람들까지 가입시켰다. 1950년대 초 30만 명이 넘었다. 상부에서 각 시·군 지부의 회원 숫자를 평가하자 실무자들은 실적을 경쟁하느라 아무에게나 회원에 대한 혜택을 홍보하며 가입시키기도 했다. 홍성에서는 좌익계 사회단체 회원과 농민조합에 가담한 적이 있던 사람 등 100명이 가입했으나 농민조합원이 많았다.

보도연맹원은 누구였나?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되자 3일 후 홍성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홍성군민 해방축하식이 열렸다. 축하식과 가두 행진이 끝나자 그동안 지하에서 독립을 생각하며 모이던 젊은 지식인들이 홍성제일감리교회에 모여 홍성군자치위원회를 결성했다. 유승준(전 국회위원)이 위원장으로, 한보국(만해 한용운 아들)이 부위원장으로 선출됐다.

중앙에서 여운형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돼 지방으로 확산되자 홍성군자치위원회는 건국준비위원회 홍성군지부로 이름을 바꿔 홍성군청에 사무실을 두고 치안업무를 관장했다. 중앙에서 건준이 인민위원회로 바뀌면서 홍성 건준도 해산, 좌·우로 분열됐다. 한보국을 중심으로 홍성군인민위원회가 결성되고 우익은 유승준을 중심으로 사회민주동맹을 결성해 나갔다. 인민위원회는 홍성읍사무소에 사무실을 두고 농민조합과 관계를 맺고 면단위 조직을 결성하며 11월 15일 미군정이 군수를 임명할 때까지 홍성군 통치 기능을 수행했다. 이후 미군정이 인민위원회를 인정하지 않자 시내 적산가옥으로 사무실을 옮겨 정치적 활동을 했다. 여성동맹, 직장동맹, 농민조합은 민주청년동맹을 결성했다.

해방 후 홍성의 농민조합원들은 몇 건의 사건을 일으켰다. 1945년 10월 18일 300여 명의 농민들이 토지개혁을 주장하며 경찰서를 습격했다. 새벽 2시 갈산과 구항지서를 시작으로 홍성경찰서를 습격했다. 19일자 미군정(G-2)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곤봉으로 무장한 한 무리의 한국인들은 6시 홍성 동쪽에 모여 거리를 위 아래로 행진해 나갔다. 그 무리는 불을 지른 경찰서 옆의 학교쪽으로 향해갔다. 4명의 한국인들이 죽자 폭도들은 근처 야산으로 흩어졌다...(중략)...폭도들이 가지고 있던 팜플릿이 발견됐는데 다음과 같은 요구조건이 들어있었다. ①토지의 평균 분배 ②쌀의 공평한 분배 ③미소공위의 조속한 재개”. 이 사건에 대해 당시 22일자 ‘동아일보’는 약 300명의 폭도가 경찰서를 습격했다고 보도하고 ‘조선일보’는 홍성경찰서 습격사건과 동시에 일어난 갈산지서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된 사람이 산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고 보도했다.

일제하 구항면 김호면 이장은 쌀 200가마를 생산하는 부자인데 자신은 세금을 안 내고 부락민에게만 분배했다며 해방후 농민조합원의 습격을 받아 쌀을 빼앗겼다. 그러자 경찰은 이자흥 조합장과 농민 6명을 구속했다. 12월 17일 150여명의 조합원들이 경찰서로 찾아가 항의 시위를 벌여 석방됐다. 그러나 농민들은 2일 뒤 다시 구속됐다.

양쪽서 버림받을 운명 예감

홍성에서는 이같은 전력을 가진 농민들을 모두 보도연맹에 강제 가입시켰다. 그러나 숫자를 채우기 위해 아무나 가입시켜 자신도 모르는 보도연맹원도 다수 있었다는 것이다. 38선에서 전쟁이 터지자 이들을 비상소집, 경찰서에 가뒀다. 당시 홍성경찰서 사찰계 형사였던 정덕래 씨는 전에 본지와 회견에서 “6·25가 발발하자 곧 면지서에서 보도연맹원에 대한 예비검속을 했습니다. 2~3일 지난 후 거의 전부를 당시 보도연맹 사무실(구 경찰서 상무관)에 집결시켜 놨지요”라고 말했다. 지켜 보았던 홍성읍 옥암리 장모 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논 매던 사람이 오라니까 일하던 옷 그대로 입고 가더군, 그게 죽으러 가는 길인 줄 추측이나 했겠어?”

당시 이강세 홍성군농민조합장 큰 딸 이종섭 씨(현재 미국에 거주)는 동생을 업고 아버지 면회를 갔다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광천 제중병원 장씨가 이강세에게 “피하라”고 권고하자 “아니다. 어차피 죽는다”고 말 하더라는 것. 천박한 자본주의의 피해에 실망한 이강세는 평등하게 사는 세상이 혹시 사회주의에 있나 들여다봤으나 김일성의 독재정치 소식을 듣고 더군다나 전쟁을 보고 실망하면서 이쪽 저쪽으로부터 버림받게 될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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