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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신문 출향인 인터뷰_ 이종상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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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신문 출향인 인터뷰_ 이종상 화백
  • 윤진아 기자
  • 승인 2012.08.13 11: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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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절반은 예산, 절반은 홍성 사람”

독도를 최초로 화폭에 담아 … 문화심기운동 앞장
율곡·신사임당 그린 유일한 생존 화폐영정화가
고향 꿈나무들 돕는 사업 꼭 펼치고 싶어

▲ 내포가 낳은 한국화의 거장 일랑 이종상 화백
한국화를 논할 때면 으례 맨 앞줄에 내세우는 미술계의 거장, 오랜 세월 아름다운 예술 언어로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메시지를 전해 온 일랑(一浪) 이종상(74) 화백을 만났다. 예술가이자 지식인으로 식을 줄 모르는 역사적 소명의식을 지닌 이 화백은 단순히 그림 잘 그리는 화가에 머물지 않는다.

날짜와 시간까지 정확하게 기억한다. 1977년 3월 7일 새벽 5시였다. 해양경찰청 도움을 받아 독도로 가는배에 타고 있던 이종상 화백은 ‘거의 다 왔다’는 말을 듣고도 섬에 가까이 닿고 있음을 실감하지 못했다. 검푸른 물안개가 연보랏빛으로 바뀌는 장관과 함께 해돋이가 시작돼서야 비로소 독도의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아름다움을 찾아 전국을 헤맨 방랑자에게 그날의 경험은 경이로움 자체였어요. ‘초행에 해돋이도 보고 입도(入島)까지 하다니, 운도 참 좋다’는 해경의 귀띔이 감동을 배가시키더라고요. 그때는 그게 행운인지도, 삶을 바꿀 운명인지도 몰랐지만요(웃음).”

한국 정신의 뿌리를 찾아 전국의 산하를 돌아다니며 진경산수화를 그린 이종상 화백은 독도를 그린 최초의 화가다. 오천원권의 율곡과 오만원권의 신사임당을 그린 국내 유일의 생존 화폐영정화가로도 유명하다. 기회가 날 때마다 화가와 시인들에게 독도 방문을 권하고, 독도를 소재로 한 시와 그림들을 남기도록 독려해 온 그의 별명은 ‘독도 교주’다. 독도로 가는 배 안에서 지겨울 정도로 설교해 붙은 별명이다.

“한반도가 내 몸이라 생각하면 독도는 좌청룡이고, 강화도 참성단은 우백호, 백두산 천지는 북의 현무, 한라산은 남의 주작이지요. 우리가 독도를 지키는 만큼 독도도 우리를 지켜 줘요.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것은 온 국민이 다 알지만 국민 마음속에 얼마나 자라고 있는가가 문제입니다. 문화적으로 실효화하는 것, 그게 독도문화심기운동입니다.”

몇 년전 도쿄에서 독도 그림전을 열기로 했다가 일본 극우파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지만, 아직도 꿈을 접지 않고 있다. 물안개 너머 찬란한 태양이 떠 있는 독도의 풍광을 담은 작품 ‘독도의 기 II’를 최고급 실크스카프로 만들어 일본 열도를 매혹시킨 일은 두고두고 보람으로 남는다. 망언을 일삼는 일본의 심장부에서 일본 여성들이 한국작가의 ‘독도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다니는 진풍경은 생각만 해도 통쾌하다.

글로벌 홍보 출판물 표지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작품인 이종상 화백의 독도 그림은 티셔츠, 부채 등 전 세계인의 일상 속에 녹아들어 독도를 일깨워 왔으며, 그의 작품으로 만든 기념품 접시와 목걸이는 정부가 국제행사가 있을 때마다 국빈들에게 선물하는 문화상품이 됐다.

예산군 발연리가 고향인 이종상 화백은 ‘충절의 고장’ 기운을 이어받아선지 고구려 벽화연구와 독도문화운동 등 험한 길을 마다하지 않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저는 태생부터 절반은 예산 사람이고 절반은 홍성 사람이에요. 유년시절 화가의 꿈을 키운 서산도 빠뜨리면 섭섭하고요. 외조부님이 홍성 읍내에서 유명한 한의사셨어요. 검증은 못 했지만 홍성에서 제일 먼저 뾰족구두를 신은 ‘신여성’도 우리 어머니라고 하더라고요.(웃음) 외가에서 공수해 온 한약재의 효과를 본 건지 체격이 쑥쑥 커지기 시작했지요. 왜정 때라 한국 아이들에게는 절대로 큰 상을 주지 않았던 ‘전국 유아동 신체검사’에서 한국 유아동 처음으로 ‘우량아 상’을 받고는, 뭔진 잘 몰라도 일본 애들을 이겼다는 기분에 흐뭇했던 기억이 나네요.”

고암 이응노 화백과도 인연이 깊다

▲ 1982년作 ‘독도의 기 II’ (89x89cm-장지화)
“이응노 선생이 돌아가시기 한 달쯤 전에 찾아가 뵈었어요.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꿈을 이루지 못했던 제 부친이 이응노 선생과 가까이 지내는 것으로 한을 푸셨다고 하더라고요. 신라 솔거의 이야기와 이응노 선생의 일화가 제게는 동시에 입력돼 있을 만큼, 어려서부터 ‘응노 형님’의 일화는 귀에 못이 박일 정도로 들었습니다(웃음).”

타국만리에서 쓸쓸히 여생을 보내던 이응노 선생을 만난 뒤, 귀국하자마자 부랴부랴 수덕여관을 찾았다. 당시 심대평 도지사에게 ‘충청도의 문화적 수치로 기록되고 싶지 않거든 수덕여관만은 절대로 헐어선 안 된다’고 권하고, 문화위원 자격으로 이의를 제기·접수한 덕에 다행히 수덕여관이 보존될 수 있었다고 귀띔하며 이종상 화백은 “홍성과 예산이 협조해야 할 일이 한둘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인터뷰 전날도 밤새워 작품활동에 매진하다 화선지 위에서 선잠을 자고 나왔다고 했다. 과연, 지치지도 않고 우리 미술의 자생성(自生性)을 찾아온 한국화단의 기둥답다. 이 화백은 서울대 동양화과를 나와 동국대에서 현역화가 최초로 인문학(철학박사)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40여 년간 서울대 교수로 재직하며, 12~3대 박물관장과 초대미술관장을 역임했다.

1997년 한국 생존작가로는 최초로 파리 루브르박물관에서 작품을 전시한 이종상 화백은 총 길이 72m, 높이 6m에 이르는 초대형 설치벽화를 통해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의 문화재 약탈과 개항기 역사를 형상화 해 국제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127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이 전시회는 국제 미술계의 호평 속에 세번의 앙코르전과 영구설치 제의를 받아 화제가 됐다.

그림을 그려 ‘세계 80인의 화가’ 반열에 오르는 명예를 얻었다는 그는 평생 그린 작품 수천 점을 사회에 기증할 계획이다. 이 화백의 소장작품과 5만여 점이 넘는 자료를 기증받기로 MOU를 체결한 인천광역시는 송도 석산 일대에 ‘인천시립일랑미술관(가칭)’을 짓고 미술관 위탁운영을 위한 별도의 재단법인을 설립할 예정이다. 예산군도 그의 생가를 복원하고 기념관을 건립하는 방안을 추진 중에 있는 것으로 안다며 이 화백은 “기왕이면 다른 지역보다 나를 화가로 키워준 고향에 좋은 문화예술 시설이 들어서기를 바란다”고 했다. ‘돈을 그린 사람의 옷깃만 스쳐도 3대가 부자가 된다’는 속설 탓에 실제로 그의 사인을 받기 위해 집까지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 초인종을 없앤 적도 있는 만큼, 부자 되고 싶은 이들이 많이 찾아오면 관광 인프라로서도 상품가치가 있을지 모른다는 너스레에 미소가 고였다.

“기념관이 건립되면 그곳에서 제가 꾸준히 추진 중인 독도운동도 전개하면서 전국 각지의 제자들을 불러 모아 교류하는 장으로 만들고 싶어요. 고향의 꿈나무들이 창의력을 키울 체험프로그램도 운영해보고 싶고요. 내포시대를 맞아 우리 출향인들의 어깨에 힘을 실어주고, 무엇보다 고향에 계신 분들에게 꼭 필요한 지역언론으로 역할을 다해 줄 내포신문의 창간에 기대가 큽니다. 칭찬할 건 칭찬하고 혼낼 일은 따끔하게 혼내주면서, 언제까지고 우리 고향 내포를 밝히는 등대지기가 되어주기를 바랍니다.”

▲ 2001년 독도 정상에서 지두작업 중인 이종상 화백.

윤진아 서울주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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