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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보훈의 달 특별 인터뷰/ 오치정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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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보훈의 달 특별 인터뷰/ 오치정 할아버지
  • 이현조 군민기자
  • 승인 2012.05.29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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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혹한 전쟁터·산화한 전우들 죄스러움에 지금도 밤잠 설쳐

한국전쟁때 학도병 … 사선 넘나들어
희미해져가는 정부 관심 마음 섭섭

여든 한살의 오치정 할아버지는 해마다 맞는 6월 보훈의 달이지만 감회가 늘 새롭다. 그는 어린 나이에 학도병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지옥과 같은 그 전쟁터에서 어렵게 살아 남았으며, 현재도 6·25참전유공자회 홍성지회장을 맡고 있어 한시도 국가에 봉사하는 마음을 놓아 본 적이 없다.

그는 1951년 1·4 후퇴 때 학도호국단 인솔 장교를 따라 홍성에서 대구까지 걸어가 제5차 학도병 모집에 지원해 8사단 21연대 신병교육대를 거쳐 대한민국 육군 이등병이 되었다. 그때 나이 겨우 18세, 홍성고등학교 3학년(당시 6년제) 재학 중이었다.

3주간의 훈련을 마치자 곧 호남지역 공비토벌작전에 투입되었다. 전 호남지역에 전선을 형성하고, 공비가 출현했다는 신고가 들어오면 주변 산을 완전히 포위하고 소탕작전을 펼치는 것이었다. 공비토벌 작전에서는 부상자나 전사자가 그리 많지 않았다. 총보다 무서운 것은 오히려 사람이었다. 작전기간 내내 밤만 되면 인민군 세상이고 낮에는 국군의 세상으로 뒤바뀌다 보니, 적과 아군을 구분할 수 없는 긴장된 대치상황,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득한 불신이 전투보다도 견디기가 어려웠다.

토벌작전 중 전방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이 상부 8사단으로 내려왔다. 인민군과 대치중인 국군 상황이 불리해 강원도 인재 북부의 여러 전방 고지들로 투입되었다. 휴전협정이 체결되기 직전이라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38선을 기점으로 밀고 밀리는 사생결단의 치열한 전투가 매일 전개되는 상황이었다. 사망자와 부상자가 속출했다. 그러다 전황이 국군에 다소 유리해지면서 다시 호남지역 공비토벌 작전에 투입되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호남지역 공비토벌작전과 강원도 인재 북방을 오가며 2년여에 걸쳐 삶과 죽음을 가늠할 수 없는 전투를 치렀다.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에는 보병에서 화학병과로 전과돼 부산에 있는 미군 화학기지창에서 훈련을 받았다. 화염방사기, 발연기 등 화학병기의 사용법과 수리, 정비 등에 대한 교육이 군 생활의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1970년 3월 30일, 일등상사로 19년 1개월간의 길고 고통스런 그러나 자랑스러운 군복무를 마쳤다.
현재 그가 지회장을 맡고 있는 6·25참전유공자회 홍성지회는 470명의 6·25 참전용사들이 회원으로 있다. 전국의 보훈관련 단체들 중 유일하게 한국전쟁에서 살아남은 용사들이 회원들이어서 전장터에서 산화한 전우들에게는 늘 빚을 지고 있는 것같아 죄스럽기까지 하다.

보훈단체라 하면 대부분 전사자나 부상자들로 구성되어 있고, 정부에서도 각종 혜택을 그들에게 편중되어 주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6·25참전유공자회는 정부로부터 내세울 만큼 혜택을 받고 있는 것이 없다. 물론 전사자들의 유가족이나 부상자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이 적다거나 그들보다 우위에 있어야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 한켠에는 섭섭함을 지울 수가 없다.

현재 홍성지역 6·25참전유공자회는 막내 회원이기도 한 오치정 할아버지가 무료봉사 형태로 사무실을 어렵게 꾸려가고 있다. 정부에서 주는 한 해 2200만 원의 지원금으로는 경상비로도 부족해 힘이 들지만 사람을 고용하지 못하고 집접 사무실 청소에서부터 온갖 잡일을 도맡아 한다.

조국을 지키려고 사지를 넘나들며 수많은 전투를 치렀고, 그 참혹했던 전쟁터의 기억들이 지금도 꿈속에 나타나 괴롭힐 때가 많다. 조국을 위해 청춘을 바친 그들에 대한 처우를 개선하고, 그들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 꼭 호국보훈의 달에만 해야 할 일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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