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의 이름이 생겨난 유래를 살펴보면 역사적인 사건과 관련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고장 홍성군 구항면에는 태봉리(胎封里)가 있다. 조선조 마지막 임금인 순종의 태를 묻었던 산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옛날부터 명산에는 왕실의 태를 묻었는데, 그 산을 태봉산 또는 태봉재로 불렀다. 홍성군과 이웃한 예산군 등에도 왕실의 태를 묻은 산이 여러 곳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 홍성에는 태봉리에 있는 태봉산 한 곳 뿐이다.
태봉리에 있는 태봉산은 특이하게도 산이 높지 않다. 언뜻 보기에는 일부러 동네 가운데에 만들어놓은 듯한 야트막한 동산이다. 옛날 임금님의 무덤 정도 크기이다.
순종임금은 1874년2월에 출생했고, 태실은 같은 해 6월에 설치한 것으로 전해진다.
태실의 보존관리를 위해 태봉산 주변 동서남북으로는 화소비(火巢碑)를 네 개 세웠다고 한다. 화소비는 능이나 묘역의 산불을 방지하기 위해 주변에 세워놓은 돌비석이다. 이 화소비 앞을 지날 때에는 말이나 수레에서 내려야 하고 인화물의 소지도 금지되었다 한다. 태봉산 주변에 세웠던 화소비는 두 개만 전해지고 있다.
전하수 홍성군 향토문화연구회장의 고증에 의하면, 태봉산 정상에 묻혔던 순종임금의 태는 1930년대에 일본인에 의해 서울근교로 옮겨졌다고 한다. 당시 목격한 주민에 의하면, 태실 속에서 비단 보자기로 쌓여있는 물체를 일본인 경관 2명이 호위하며 옮겨갔다고 한다. 아마도 일본인들이 태실 이장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왕실의 권위를 떨어뜨리고 민족정기를 말살하려는 속셈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태봉산과 인근 토지는 구 왕실재산으로 관리했었으나, 일제시대에 개인에게 불하되어 인근 주민의 소유로 바뀌었다. 지금은 지역 주민이 아닌 외지인 소유로 바뀌어 있다. 원래는 수풀이 우거지고 아름다웠을 태봉산이, 외지인 소유자에 의해 공동묘지처럼 마구잡이로 파헤쳐져 있었다. 마을의 상징이며 역사적인 사연이 깃들어있는 태봉산을 바라 보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원래 태봉산에는 이 마을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던 담양전씨 선대의 묘소가 있었다고 한다. 왕실의 권세에 밀려, 담양전씨 선대묘소는 구항면 내현리 보개산 중턱으로 옮겨졌다고 후손들이 전한다. 묘소의 주인공은 홍주영장을 지냈던 전시원의 할아버지라고 한다.
태봉산에서 담양전씨 문중의 선대 묘소를 이장할 때, 재미있는 얘기 하나가 전해진다.
산소를 이장하기 몇 년 전에, 전시원의 아버지가 구항면 내현리 보개산속 험한 고개에서 호랑이를 만난 적이 있었다고 한다. 호랑이는 입을 딱 벌리고 앉아있는데, 가만히 들여다보니 목에 비녀가 박혀있는 것이었다. 호랑이는 사람을 잡아먹고 목에 비녀가 걸려서 꼼짝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시원의 아버지는 호랑이의 소행이 괘씸하기는 했지만, 입속에 손을 넣어 비녀를 빼주었다. 호랑이는 고맙다는 시늉을 하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몇 년 후에 전시원의 아버지가 태봉산에 안장됐던 유골을 보개산으로 이장해 올 때, 이 호랑이가 나타난 것이다. 호랑이가 따라오라는 시늉을 하며 이장행렬의 앞에 서서 걸어가는 것이었다. 한참 앞서가던 호랑이는 지금의 묘 자리에 서서 땅바닥을 몇 번 득득 긁고는 사라지는 것이었다. 후손들은 호랑이가 잡아주고 간 자리에 옮겨 온 조상의 유골을 모셨다고 한다.
호랑이를 구해준 선행이, 조상을 잘 모실 수 있는 명당자리로 보답 받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