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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 홍성 뛰어 넘어 대한민국 대표하는 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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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 홍성 뛰어 넘어 대한민국 대표하는 위인
  • 윤종혁
  • 승인 2022.07.18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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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의 길을 찾아서<4>

서슬 퍼런 일제강점기를 불꽃같이 살다간 한용운 선생. 결성면 성곡리에서 태어난 만해 한용운 선생은 일제 강점기에 왜곡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면서 언론, 교육 활동을 활발히 하고 불교의 사회개혁론을 주장했다. 또한 민족독립운동에도 앞장섰다. 1918년 11월부터는 불교 최초의 잡지인 <유심>을 발행했고, 1919년 3·1만세 운동 당시 독립선언에 참여해서 체포당한 뒤 3년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 풀려났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 언론활동에 참여했다. ‘만해의 길을 찾아서’ 기획취재를 통해 만해 한용운이 누구인지를 다시금 되돌아보고, 자라나는 홍성 지역 청소년들이 만해를 쉽게 만나 볼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지를 모색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조선총독부가 보기 싫다고 지은 북향집. 50여 평의 대지 위에 11평의 작은 집 심우장에는 한용운이 쓴 글씨, 연구논문집, 옥중공판기록 등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심우장에 가기 위해서는 좁은 골목길을 걸어 올라가야 한다. 만해를 만나기 위해 사람들일 골목을 오르고 있다.

민족 자존 상징하는 공간, 심우장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222-1번지. 좁은 골목길을 걸어 올라가면 벽산스님이 집터를 기증하고 조선일보사 방응모 사장 등의 도움으로 만해가 1933년에 지은 ‘심우장’이 있다. 조선총독부가 보기 싫다고 지은 북향집. 50여 평의 대지 위에 11평의 작은 집에는 한용운이 쓴 글씨, 연구논문집, 옥중공판기록 등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만해가 죽은 뒤에는 외동딸 한영숙이 살았고, 지금은 만해 사상연구소로 사용되고 있다. 만해는 최린이 변절하자 심우장으로 찾아와도 일절 만나주지 않았다. 스님이 집에 없을 때 최린이 딸에게 준 돈을 명륜동 그의 집으로 찾아가 집어던지고 돌아온 일화는 유명하다.

만해는 이곳에서 재정난으로 휴간됐던 <불교>지를 속간했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한 독립운동가 김동삼 선생의 장례를 치렀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묘비를 세우는 등 민족독립과 불교개혁을 위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조선총독부와 경찰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도 만해는 심우장에서 독립운동과 불교개혁의 꿈을 놓지 않았다.

심우장이란 명칭은 선종의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열 가지 수행 단계 중 하나인 ‘자기본성인 소를 찾는다’는 심우(尋牛)에서 유래했다. 만해는 성북동 깊은 산골짜기에 기거하며 ‘소’, 즉 본성이 무엇인가를 찾기 위한 ‘심우’ 단계로 돌아가 조국과 민족을 생각했다. 팔각지붕 아래 왼쪽에 걸린 현판은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서예가 오세창이 쓴 것이다.

한용운이 심우장에서 기거하던 1930년대 중반 이후는 일본 제국주의의 극성기로 독립운동에 대한 강한 탄압이 이뤄지던 시기였다. 최린, 최남선 등이 친일로 변절한 것도 이때의 일이다. 그러나 한용운은 끝까지 일제와 타협하지 않았고, 그가 기거하던 심우장은 민족 자존을 상징하는 공간이 되었다. 하지만 한용운은 끝내 광복을 보지 못하고 광복을 1년여 앞둔 1944년 6월 29일 심우장에서 입적했다. 당시 나이 66세다.

만해, 망우역사문화공원에 잠들다

만해는 망우역사문화공원에 잠들어 있다. 망우역사문화공원은 경기도 구리시와 서울 중랑구에 걸쳐 있다. 망우역사문화공원은 예전 망우리 공동묘지로 불렸다. 이곳에는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이끌어 간 80여 명의 선구자가 잠들어 있다. 만해 한용운을 비롯해 어린이날을 만든 방정환, 죽산 조봉암 등 수많은 인물들이 안장됐다.

지난달 29일 망우역사문화공원에서는 만해 한용운 선사 78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류경기 중랑구청장과 만해 한용운 선사의 고향인 홍성문화원 관계자, 주민 100여 명 등이 참석했다. 선사의 묘역을 관리하는 영원한 기억봉사단원들도 함께 했다. 참가자들은 ‘님의 침묵’ 낭독과 추모사, 헌화 등의 순서로 추모식을 진행하며 선사의 숭고한 삶과 업적을 기렸다.

만해 한용운 78주기 추모식을 맞아 홍성군민 80여 명이 만해 묘를 찾아 참배했다. 사진 왼쪽이 만해 묘이고, 오른쪽이 부인 묘다.
만해 한용운 78주기 추모식을 맞아 홍성군민 80여 명이 만해 묘를 찾아 참배했다. 사진 왼쪽이 만해 묘이고, 오른쪽이 부인 묘다.
만해 한용운 선사 78주기 추모식이 지난달 29일 서울 중랑구 망우역사문화공원에서 진행됐다. 
만해 한용운 선사 78주기 추모식이 지난달 29일 서울 중랑구 망우역사문화공원에서 진행됐다. 

류경기 중랑구청장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독립운동을 펼치신 한용운 선사의 의로운 절개를 기억하고자 추모식을 마련했다”라며 “망우역사문화공원에 잠들어 계신 선사를 비롯한 우리 역사를 대표하는 훌륭한 분들의 뜻을 널리 알리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하겠다”라고 말했다.

중랑문화재단 표재순 이사장은 추모사를 통해 “어두웠던 시기 만해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드러내놓고 일제와 싸웠다. 종교인이자 독립운동가로 엄혹했던 시기, 민족의 혼을 깨웠다. 님이 가야 할 길이 어떤 방향인지를 가슴 깊이 세겨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중랑구사암연합회장 퇴휴스님은 “일제강점기는 어렵고 힘든 시기였다. 많은 사람들이 조선 독립을 포기하고 좌절했다. 살고자 민족을 배반한 지도자도 있었다. 엄혹했던 시기 만해는 민족의 정신적 지도자이었고, 홍성을 뛰어 넘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위인”이라고 치켜세웠다.

서울 중랑구 망우역사문화공원에서 열린 만해 한용운 선사 78주기 추모식에 참석한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고 있다. 
만해 한용운 선사 78주기 추도식에서 유환동 홍성문화원장을 비롯한 내빈들이 헌화를 하고 있다. 

만해 묘소 홍성 이장 현실적으로 불가능

망우역사문화공원에 안치된 만해 묘소를 홍성으로 이장해야 한다는 주장은 어제오늘의 목소리가 아니다. ‘만해 한용운 선생 기념사업회’는 만해 묘를 홍성으로 이전하기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지금도 일부에서는 만해 묘소를 홍성으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만해 한용운 묘는 2012년 10월 19일 등록문화재 제519호로 지정됐다. 지정 면적은 226㎡이다. 부인 유숙원의 묘와 나란히 조성돼 있다. 비석은 1981년 12월 만해사상연구회가 세웠다. 묘의 연보비에는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지 않으려는 것은 인류가 공통으로 가진 본성으로서, 이 같은 본성은 남이 꺾을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스스로 자기 민족의 자존성을 억제하려 하여도 되지 않는 것이다. <조선독립에 관한 감상> 중에서’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중랑구 이혜성 문화해설사는 “홍성 사람들이 만해 묘소 이장을 많이 원하고 있지만 등록문화재로 지정됐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중랑구에서도 만해 한용운 묘소를 소중히 여기고 가꾸고 있다. 한용운은 충남 홍성과 중랑구, 성북구를 서로 연결시켜 주는 소중한 인연”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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