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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다른 경험과 열정으로 언어치료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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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다른 경험과 열정으로 언어치료 노력
  • 신혜지 기자
  • 승인 2021.06.19 05: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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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언어심리발달센터 박옥현 센터장

남편 권유로 언어치료 입문

예산언어심리발달센터 박옥현 센터장이 언어치료에 대해 알게 된 것은 2004년도이다. “아이가 둘 있는데 아이들이 중·고등학생이 되면서 혼자만의 시간이 생기게 됐어요. 혼자만의 시간이 생기다 보니 다른 일을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당시 혜전대학교에서 근무 중이던 남편이 언어치료과를 추천해 주면서 그때 처음 알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걱정이 앞서 바로 진학을 결정하지 못했지만 남편의 적극적인 지지로 2005년도에 혜전대 언어치료과에 입학하게 됐다. 자녀를 둔 학생은 7명이었는데, 5명이 장애인 자녀를 둔 엄마였다. 장애인 자녀를 둔 엄마들은 경험이 있다 보니 수업 중 질문도 많이 했지만 박 센터장은 아는 것이 없어 질문을 하나도 하지 못했다. 대신 그들이 하는 질문을 귀담아 들었다. 처음에는 언어치료에 대해 관심도 없었던 그녀지만 나중에는 과 수석까지 당당히 차지했다.

그렇게 2007년에 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자격증을 취득해 홍성교육청에 근무를 시작했다. 당시에는 방과후 언어치료사가 부족해 자리가 있었다고 한다. 그 뒤로도 예산교육청이나 다문화센터, 장애인복지관 등 다양한 경력을 쌓았다. 처음은 남편의 추천을 계기로 언어치료사를 시작하게 됐지만 그녀의 열정만은 남달랐다. 홍성교육청을 근무하면서 부족함을 느낀 박 센터장은 대구사이버대학교 언어치료학과에 입학해 언어치료와 놀이치료를 복수전공 했다. 배움에 갈증이 남아 있었던 그녀는 2016년에는 대학원에 도전했다.

대학원 재학 당시에는 남편의 건강이 악화돼 원래 다니고 있던 대학원이 아닌 빨리 졸업할 수 있는 용인에 있는 대학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낮에는 출근하고 오후 6시부터는 대학원 수업을 듣기 위해 용인까지 이동했다. 수업이 끝난 새벽 12시에는 남편의 간호를 위해 병원에서 잠이 드는 일상의 반복이었지만 2018년 어렵사리 대학원을 졸업했다. 대학원을 다니면서 지금의 예산언어심리발달센터를 2015년에 문을 열었다.

박 센터장은 현재 홍성읍 고암리에서 살고 있지만 센터를 오픈하기 전 예산교육청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다. 예산에 제대로 된 센터가 없다 보니 아이들이 홍성, 보령, 당진 등 다른 지역으로 치료를 받으러 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예산에 센터를 차리게 됐다. “언어치료는 오랜 시간이 걸리다 보니 멀리 다른 지역으로 다니다 보면 경제, 체력적으로 소모가 너무 많이 돼 부모님들이 지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예산 아이들이 가까운 곳에서 치료를 다녔으면 하는 마음에 센터를 열게 됐죠.”

박 센터장은 언어치료사 자격증에도 세 번이나 도전했다. 2007년 자격증을 취득했지만 전문대학을 졸업하고 취득하는 자격증과 4년제 대학을 나와 취득할 수 있는 자격증이 달라 대학사이버대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시험을 봤다. 이후 국가고시로 시험이 변경되면서 2014년도에 다시 시험에 도전했다. 세 번이나 시험을 봐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녀는 시험을 보는 족족 바로 합격했다는 것이다.

훌륭한 치료사 되는 것 목표

센터는 비장애인, 장애인을 비롯해 뇌졸중이나 실어증을 앓고 있는 어른들도 많이 방문하고 있다. “센터는 한 번 다니면 10년 이상은 다녀야 되기 때문에 24개월부터 다니는 아이도 있어요. 24개월이면 단어 두 개를 붙여서 말을 할 수 있는데 낱말도 얘기를 못 하면 센터를 찾아 주시죠”

박 센터장은 지금은 중학생인 학생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그 학생을 봤는데 처음 센터를 방문했을 때는 발아를 아예 하지 못했다. 당시 아이의 할머니가 ‘언제 말을 할 수 있냐’고 물을 정도였는데, 지금은 조금씩 말을 시작했다고 한다. 가장 쉬운 양순음부터 시작해 혀가 약간 올라가는 ‘ㄱ’과 같은 연구개음, ‘ㅈ’과 같은 경구개음이 들어간 단어를 말할 수 있게 됐다.

다른 학생은 3살에 센터를 방문한 학생인데, 처음에는 성격이 너무 까칠해 엄마와 분리가 아예 되지 않았다고 한다. 한 달 동안은 엄마와 함께 수업을 듣고 서서히 분리시켰지만 혼자 노는 것을 너무 좋아하고 중재가 아예 되지 않았다. “그랬던 학생이 지금은 저에게 먼저 안기고 집에서는 엄마가 ‘아이가 너무 시끄럽다’고 말할 정도예요”

학생들 중 발아를 아예 하지 못하고 센터를 방문하는 경우도 많다. 가끔 치료실에서 박수와 함성소리가 들리면 학생이 처음으로 의미 있는 말을 내뱉은 것이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뿌듯함이 느껴진다. 박 센터장은 언어치료는 치료가 이런 효과를 가지고 올 수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는 놀라운 매력을 느꼈다. “무발아 아이가 발아했을 때 치료로 인해 이해하고 표현을 할 때 말로 할 수 없는 쾌감, 희열감과 같은 감정이 느껴져요.”

그녀는 앞으로도 유명한 치료사보다는 훌륭한 치료사가 되는 것이 목표다. 전문지식과 현장에서 쌓은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학생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건강이 허락하는 한 치료를 이어 가고 싶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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