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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지역 숨겨진 이야기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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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지역 숨겨진 이야기 23
  • 홍성신문
  • 승인 2020.09.21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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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버힌 솔이 낙락장송 아니런가
정충사와 낙락장송 모습. 사진 제공=평택임씨 문중

홍성군 서부면 판교리 청룡산 서쪽 기슭에 정충사(靖忠祠)가 있다. 정충사는 청난공신(淸難功臣) 임득의(林得義, 1558~1612) 장군의 사당이다. 임득의 장군은 임진왜란 중인 1596년(선조29)에 이몽학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청난공신 3등에 녹훈된 인물이다. 이외에도 1605년에는 호성원종공신 1등, 1607년에는 선무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었다. 이후로는 병마절도사를 지냈다.

1612년 향년 54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경기도 양주시에 안장됐다. 사후에 정2품 자헌대부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1632년에 장군의 묘를 경기도에서 이곳 서부면 판교리 청룡산 기슭 서쪽으로 이장했다.

정충사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01호, 임득의 장군 묘는 충청남도 문화재 340호, 임득의 장군 초상화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203호로 지정돼 있다. 정충사에는 매우 의미있는 나무들이 여러 그루 있다. 그중에도 노송 한 그루는 역사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정충사 소나무는 일명 장군송으로 부른다. 다른 이름으로는 낙락장송이라고도 부른다. 장군송은 임득의 장군 산소 이장 후에, 집안의 3대에 걸친 과거급제자 배출을 기념하며 심었다고 한다. 2012년에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의 자료에는 수령이 250년으로 추정된다고 기록되었다.

장군송은 우리나라 재래종 소나무인 적송(赤松)이다. 임득의 장군 묘역 아래쪽에 서 있으며 흉고 둘레는 2.1m, 높이는 15m 정도 된다. 전체적인 모습은 매우 고고한 자태를 뽐내며 힘찬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정충사 경내에서 바라보면 장군송의 수려한 자태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장군송이 임득의 장군 묘역아래를 수문장처럼 지키며 주변 경관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장군송을 문중에서는 낙락장송(落落長松)이라고도 부른다. 문중에서 장군송을 낙락장송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낙락장송은 임득의 장군의 중조부(中祖父)인 임형수(林亨秀,1514~1547) 선생의 아까운 죽음을 애도한 시로부터 유래된다.

임형수 선생은 18세에 진사시에 급제하고 22세에 별시문과에 급제했다. 이후 당대 최고 학자들에게 제공하는 독서당에서 사가독서를 했다. 당시 독서당의 동기들은 하서 김인후, 퇴계 이황, 송재 나세찬 등이었다. 퇴계 이황 선생은 10여 살이나 연하인 임형수 선생을 “남자 중의 남자, 기남자”라 부르며 존경했다고 한다.

당시는 을사사화와 정미사화 등 당쟁이 심하던 시절이었다. 임형수 선생은 부제학 등의 벼슬에 올랐지만 당쟁의 희생양이 되었다. 명종 때 문정왕후의 동생이자 실권자였던 윤원형 일파에 의해 제주목사로 좌천되었다가 을사사화로 파직되었다. 제주목사 파직 후에 양재역 벽서사건이 터지면서 대윤파 윤임의 일파로 몰려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했다.

이당시 임형수 선생의 절명을 안타까워하며 지은 시조에 낙락장송(落落長松)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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져근덧 두던들 동량재 되리러니

어즈버 명당이 기울면 어느 남기 버티리.

독서당에서 함께 공부했던 하서 김인후가 지은 시조이다. 이 시조는 1547년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사약을 받고 죽은 임형수 선생에 대한 만시(輓詩)다. 임형수 선생의 죽음을 대들보가 될 만한 소나무를 베어버린 것으로 비유하고 있다.

당시 임형수 선생의 죽음을 애도하는 이가 많았다. 퇴계 이황 선생은 “사수(임형수 선생의 자)가 하세했으니 누구와 학문을 논할까! 어찌하면 호탕한 임사수와 서로 대면할 수 있으랴” 라고 애탄했다고 한다. 낙락장송(落落長松)은 가지가 축축 늘어지고 위풍당당하게 서있는 소나무를 말한다. 훌륭한 인물이나 기개가 높고 본받을 만한 인물을 비유적으로 표현할 때 등장하는 소나무다.

임형수 선생의 후손들은 낙락장송을 가슴속에서 잊지 않고 살아왔다. 소나무가 세월과 함께 점점 자라면서 훌륭한 낙락장송이 될 것을 기대하며 남다른 의미를 부여했다. 이들 두 그루 소나무를 후손들이 대대손손 잘 가꾸고 보존하기를 염원했다. 선조들의 훌륭한 뜻을 이어받아 낙락장송처럼 곧고 강인하게 자라 국가의 동량이 될 것이라 믿었다.

이곳 임득의 장군 후손들은 선조들의 염원을 저버리지 않았다. 바로 낙락장송에 담겨있는 선조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살아왔다. 이곳은 홍주 항일의병의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임한주 선생을 비롯하여 8명의 독립 유공자를 배출한 산실이 되었다.

특히 임한주 선생은 남당 한원진 선생의 학풍을 계승하며 홍주의병에 참여했고, 홍주의병 기록인 홍양기사를 썼다. 홍양기사는 홍주의병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1919년에는 전국의 유림들과 함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기 위한 파리장서운동을 주도했다.

정충사 낙락장송은 충의지심(忠義之心)의 상징이다. 우리고장의 역사·교육적인 가치와 경관적 가치를 살려 대대로 잘 가꿔나갈 필요가 큰 나무다. 안타깝게도 현재는 한 그루만 전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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