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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마면 송암리 구암마을 - 사람 사는 이야기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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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마면 송암리 구암마을 - 사람 사는 이야기 ①
  • 홍성신문
  • 승인 2020.06.15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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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바라보며 간절함을 비는 지아비

마을의 유래와 역사
금마면 송암리는 백제 때 금주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임성군에 속했다가 고려 때는 흥주에 속했다. 조선 초엽에는 흥주군 평면이었으며, 1914년 3월 1일 군면 폐합 조치에 따라 구암리, 송라리, 산직리, 하월리, 석성리, 와야리, 신흥리 및 상월리의 일부를 병합, 송라와 구암의 이름을 따서 ‘송암리’라 하여 흥성군 금마면에 편입됐다.
구암에 집성씨족이 들어와 산 것은 조선시대 초반으로 추정된다. 해주최씨, 흥주이씨, 안동권 씨가 집성씨족을 이루며 세거하다 점차 줄어 현재는 각성바지 마을이다. 흥주이씨 소곤이파 30대손 이종엽 씨에 따르면 홍주이씨 시조는 이유성이다. 고려 중엽 이유성은 장곡에 들어 온 후 이거해 구암마을에 들어왔다고 한다. 흥주이씨는 퇴뫼산 서북쪽을 통해 송암리 와야마을로 들어온 후 송라(현재 소래울)로 이거했다. 과거 해주최씨가 신곡리와 송암리를 사패 받았다. 해주최씨 문정공파 7대손 최홍섭 씨에 따르면 구암마을에 들어온 해주최씨는 최동범으로 광천읍 대평리에서 천연두가 유행해 구래로 들어왔다고 한다. 안동권씨는 12대조권학이 홍동면 대영리를 사패지로 받아 세거하다 구암마을에 이거해 지금에 이른다.
구암마을에는 구전으로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전언에 의하면 구래 ‘거먹배미’라 부르는 논에 거북이 모양의 바위가 있었던 것에서 유래하는데 그 바위는 전주에 의해 캐버렸다고 한다. 또 다른 주민에 따르면 마을에 이름난 바위 9개가 있었던 것에서 유래하는데, 현재는 9개 바위 중 김성골 뒤편에 금바위만이 남아 있다. 구암은 현재의 구래동네를 칭하는 지명이었다가 마을 전체를 부르는 말로 정착됐고, 구래는 자연마을을 부르는 말로 정착했다. 김성골은 김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주로 살고 있어 ‘김성골’이라 부르게됐으며,‘기’ 발음이 노’으로 변하는 충청남도 발음 특성으로 ‘짐성굴’로 불리기도 한다. 김성골은 ‘통굴’이라 부르기도 한다. 소래울은 1960년 무렵까지도 ‘송라’로 불리곤 했다. 송라의 어원은 당시 왕솔나무가 빽빽하게 자라던 모습에서 연유하는데, 송라는 솔 송(松)자에 벌 라(羅)자를 쓴다. ‘송라’가 ‘소래울’로 불리기 시작한 이유와 정확한 시기에 대해서는 기억하는 주민이 없다.

구래는 예로부터 불이 자주 났다. 전언에 의하면 구래 앞을 지나던 스님이 풍수지리적으로 구래와 마주 보는 와야마을 사이를 나무로 막으면 마을에 화를 면할 수 있다고 한 후 최홍섭 씨 조부 최신보 씨와 주민들이 상수리나무를 방풍수로 식재했다. 현재는 이영애 씨 논 앞의 상수리 나무 서너 그루만 남아 있다. 한상문 이장은 구래에 불이 나던 예전 풍경을 기억하는데 구래 동네 사람들이 모두 대야를 들고 나와 한 줄로 서서 샘에서 불난 곳까지 물을 운반해 껐다고 한다.
소래울에 거주하는 이종엽 씨 조부 이인춘 옹과 사촌 형제 6명, 양의진 씨 조부 양주환, 작은 조부 양기환 옹은 금마면 3.1 운동에 참여했다. 자손들에 따르면 소래울 꽃봉재(화봉산)에 올라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부평리 철마산 독립운동기념탑에 이름이 등재됐다. 당시 만세운동을 했다 붙잡혀간 이들은 매를 심하게 맞아 고인이 되거나 사는 동안 후유증으로 앓다가 작고했다.
안양헌 씨 조부인 고(故) 안성삼 옹은 상여를 만들었다. 마을주민 이종엽 씨는 안성삼 씨가 만들던 상여 부속품을 기 억하는데, 함석을 오리고 물칠(색칠)을 해서 사람 얼굴만한 목단 꽃을 만들어 상여에 꽂았고, 사람 모양은 나무로 만들어 꽂았다고 한다. 마을주민 최기석 씨는 1950년 대 중학교 시절 옛 상여를 폐기하고 새로운 상여를 만들던 때를 기억한다. 상여의 부속은 모두 안성삼 씨가 만들고 상여대로 사용하던 나무가 근방에 없어 천안에서 소나무 2개를 사왔다고 한다. 회갑잔치가 있는 집안은 안성삼 씨에게 잔치에 쓰일 종이꽃을 부탁했다.
한편 일제 강점기 소래울에 살던 이대순 씨는 지극한 효성으로 마을 주민들의 추천을 받아 효부상을 받았다. 이종엽 씨 조부 이인춘 씨가 발 벗고 나서 이대순 씨의 효부상 수상을 도왔다고 한다. 이대순 씨 가옥은 리모델링을 해 현재는 손자 이경엽 씨가 살고 있다.

이밖에도 새마을사업으로 주택개량과 마을 안길 확장 등이 이뤄지고 1975년 전기가 들어왔다. 주민들에 따르면 전봇대가 흙바닥 밑으로 파고 들어가지 않도록 삽 머리판을전봇대 밑에 구덩이를 파고 전봇대를 세웠으며 논 가운데있는 전봇대까지 모두 주민들이 세웠다. 1980년대 새 마을구판장이 운영됐고, 전화가 개설됐다. 경지정리는 1997년에 이뤄졌다.

사람사는 이야기
농부(農夫)는 농사를 짓는 사람을 말한다. 농사 농(農)자를 보면 굽을 곡(曲)자에 별 진(辰)자를 사용한다. 곡(曲)자는 ‘굽히다’는 뜻도 있지만 ‘간절하다’는 뜻도 있다. 직역하면 ‘별을 바라보며 간절한 마음을 비는 지아비’라는 뜻이 될 듯하다. 땅에 씨를 뿌리고, 가꾸고, 수확해 판매를 하는 모든 일이 농부의 일이다. 자연이 허락하는 대로 진심을 다해 일하는 사람이다.
구암마을에는 상수리를 주변에서 주워 상수리묵을 만들어 홍성전통시장에서 판매하는 박흥순 씨와 직접 키운 채소들을 판매하는 이만순, 최경자 씨가 있다. 소래울에 사는 이만순, 최경자 씨 부부는 흥성상설시장과 오일마다 열리는 흥성전통시장에서 직접 키운 채소들을 판매한다. 수세미, 배추, 달래, 갓, 무, 고추 등 그 중에서도 가을상추가 가장 인기 있는 품목이다. 이만순 씨는 비닐하우스 한 동에 상추만을 가득 심어 가꾼다. 다른 한 동에는 수세미가 있다.
“하우스 상추는 거의 11월까지 수확한다. 상품 가치가 있을 때까지는 재배해서 판매한다.”
구암마을에서는 1980~90년대 마을 대부분의 가구에서 옥수수를 수확해 홍성전통시장에서 판매했다. 그래서 한여름 옥수수는 금마면에서 다 판다는 우스갯소리도 오갔다고 한다. 이만순 씨는 지금도 약 700여 평의 밭에 옥수수를 심는다.
“5월에서 6월까지 옥수수를 심는데 100평씩 순차적으로 심는다. 7월 중순부터 수확하기 시작해 9월까지는 판매한다. 금마 사는 옥수수 장사라고 하면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거의 해마다 먹어본 사람들이 많이 산다. 올해는 태풍이 와서 400평 이상이 절단 났다.”
이만순 씨 옥수수 맛의 비결은 거름에 있다. 발효된 축분을 이용한 거름은 옥수수의 빛깔뿐만 아니라 찰진 맛을 내주는데 한 몫 한다. 장사를 시작한 지 20여 년이 된 부부는 대량 생산이 아니기에 시장에서 직접 판매하는 일을 택했다고 한다. 일요일을 제외하고는 늘 시장 한 편에서 자리를 지키는 이 씨 부부가 짧아진  겨울 해를 등지고 별이 총총한 집으로돌아가는 길, 농부의 고단함과 부지런함이 함께 한다.

<다음호에 계속>조사, 글 김옥선, 이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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