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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대, 우리의 삶은…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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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대, 우리의 삶은…⓵
  • 홍성신문
  • 승인 2020.06.14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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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가 서쪽으로 가는 까닭
권 미 림 커피비평가협회 충남본부장
권 미 림 커피비평가협회 충남본부장

며칠째 오르간 연주곡을 듣고 있다. 밀림의 성자(聖者), 슈바이처가 들려주는 바흐의 곡들이다. 그가 연주하는 바흐엔 무엇보다 비장함이 깔려 있다. 세상의 신을 벗고 하늘을 향해 무릎 꿇어야만 할 것 같은 경건함, 두 손에 든 빵 대신 성서를 들어야만 할 것 같은 엄숙함, 그리고 가녀린 어깨나마 내어 누군가의 의지가 돼주어야만 할 것 같은 간절함이다. 작품 번호(BWV) 731, <복되신 예수, 주 말씀 앞에>에 이르면 분위기는 더한층 고조된다. 음표 하나하나를 씻기고 감싸고 어루만지는 듯한 그의 연주는 세상의 모든 생명들을 품고 거두는 봄날의 햇볕을 닮아있다. 어쩌자고 그는 바흐의 곡들을 그토록 애절하게 연주한 것일까. 천상의 소리처럼 들리는 그의 연주는 어쩌면 세인과는 다르게 살려 한 그의 노력에서 기인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너와 나의 경계를 넘어 온 인류를 피붙이처럼 감싸 안으려 한 인류애, 타인의 고통을 내 것인 양 끌어안으려 한 애긍함, 자신의 모두를 걸어 죽어가는 생명들을 살려내려 한 간절함이 오르간 연주를 통해 신비의 소리로 드러나는 것이다. 음악마저 생명을 위한 헌신이 되어갈 때, 그리하여 연주회를 통해 얻어지는 수익금마저 죽어가는 생명들을 살려 줄 종잣돈이 되어갈 때, 연주자의 마음에 실리는 무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간절함이 되어 세상을 울렸을 것이다.

슈바이처가 오르간 연주의 대가였음을 알게 된 건 근자의 일이다. 코로나19로 자발적 은둔자가 되기 전까지, 그는 그저 옛사랑만큼이나 희미한 기억 속 존재일 뿐이었다. 동유럽 어딘가에서 태어나 아프리카 어느 부족을 돌보았다는 것, 밀림의 성자로 추대되며 노벨 평화상을 받았고 이 때문에 인술을 베푸는 사람들을 흔히 <oo계의 슈바이처>로 부른다는 게 그에 대한 지식의 전부였다. 그가 파이프 오르간의 대가였음을 알게 된 건 순전히 코로나19 덕분이었다. 열정을 가진 자에게 위기는 변화의 깃발이 되어 다가온다. 코로나19로 멈춰진 외적 성장은 내면의 성숙으로 자리를 대신했다. 줄어드는 강의만큼 헐렁해진 시간들을 독서로 채우며 슈바이처는 그렇게 내면의 자산으로 새롭게 다가왔다. 의사이기 이전에 목사이자 음악가였던 그는 <아프리카에선 흑인을, 유럽에선 오르간을 구한> 생명의 빛이었다. 신학과 음악, 의술이라는 자신의 역량을 오직 생명을 살리는 일에 쏟아부으며 그는 마침내 밀림의 성자(聖者)가 되어간 것이다.


<히스테리아 시베리아나>라는 병이 있다. 시베리아의 농부들이 걸린다는 이 병은 밭을 일구던 농부가 문득 곡괭이를 내던지곤 서쪽을 향해 한없이 걸어가다 죽는다는 병이다. 사방이 온통 지평선뿐인 아득함, 시작도 끝도 없는 노동의 힘겨움을 생각하면 불현듯 찾아오는 내면의 허기는 가히 공감이 가고도 남는다. 허전한 것이 어찌 시베리아 농부들뿐이겠는가. 노동의 대열에서 낙오할까 질주해온 현대인에게, 코로나는 어쩌면 내 안의 무언가가 툭, 끊어지기 전 한 번쯤 쉬기를 권하는 신의 배려인지도 모를 일이다. 동쪽 지평선에서 해가 뜨면 나가 서쪽 지평선으로 해가 질 때 돌아오는 도돌이표와도 같은 우리네 일상은, 생명을 위해 모든 걸 바쳤던 슈바이처의 삶처럼 그렇게 목표가 분명한 삶을 회복할 때 비로소 지금의 위기를 넘기고 새로운 세계에 안착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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