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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은 공산연합군이 대한국을 무력 침공한 공산연합군과 유엔연합군의 3차 세계대전
icon 김민수
icon 2015-06-23 12:25:59  |   icon 조회: 57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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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은 공산연합군이 대한국을 무력 침공한 공산연합군과 유엔연합군의 3차 세계대전





일본군국주의 통감통치(1906-1910), 총독통치(1910-1945)가 대한국(大韓國) 분단의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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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大韓國:1897- )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1897-1919)는 1897년 10월 12일 백악(白岳)과 목멱 (木覓) 사이의 경운궁(慶運宮:정문은 인화문) 대안문 앞 황단(皇壇Hwangdan)에서 천제(天祭)를 봉행하고 대한국(大韓國) 1대 광무제에 등극하며 천하에 신라(新羅 Silla)·고례(高禮 Gorea)·백제(百濟 Baekje)의 3한국(三韓國)을 아우른 큰 한(韓)이라는 이름이 적합하므로 국호(國號)를 대한(大韓)이라 하고 1897년을 광무(光武) 원년(元年)으로 천명하여 대한시대(大韓時代:1897- )가 시작되어 군주제(君主制)의 대한국(大韓國)의 국호 및 영토,영해가 1919년 4월 공화제(共和制)의 대한국(大韓國)으로 계승되었다. 대한시대 대한광복운동기(1906-1945)인 1919년 3·1대한광복운동 후 4월 10일 중국 상해에서 대한국인 천여 명과 신한청년당이 주축이 되어 29인의 의정원(議政院) 제헌의원이 모여 대한국 정부를 수립하였으며 4월 10일 의정원(議政院)의 개원 회의에서 국호는 대한(大韓)으로, 정체(政體)는 공화제로 각각 의결함으로써 1919년이 대한국(大韓國:1897- ) 공화제(共和制)의 원년이 되었다. 대한국 헌장을 제정하여 1조에서 대한국(大韓國)은 민주공화국(民主共和國)으로 함이라 천명함으로써 대한(大韓)이라는 국호를 사용하였다. 2차 의정원 의원 57인이 참석하여 의정원(議政院) 의원을 선출했으며 의장은 이동녕, 부의장은 손정도를 선출했다. 의정원(議政院)은 법률안 의결, 대통령 선출 등 국회와 같은 기능을 했다. 의정원(議政院)은 국호를 대한국(大韓國)으로 정하고 민주공화제(民主共和制)를 골간으로 한 헌장을 채택한 뒤 선거를 통해 국무원(國務員)을 구성하였다. 대한국(大韓國) 정부 국무원(國務員) 행정수반인 국무총리(國務總理)에 이승만(李承晚)을 추대하고 내무 안창호, 외무 김규식, 군무 이동휘, 재무 최재형, 법무 이시영, 교통 문창범 등 6부의 총장을 임명한 뒤 4월 13일 대한국 공화제 정부 수립을 선포하였고 한성(漢城)에는 한성정부가 수립되었고, 연해주에는 대한국민의회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9월 상해 임시정부에 통합되었고 이승만(李承晚)을 대한국(大韓國) 공화제 정부의 외국에 대하여 국가를 대표하는 최고 통치권자 국가 원수(國家 元首)인 대통령(大統領:제정 황제에서 공화정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6·25경인전쟁은 세계 공산국가의 지도국인 소련의 스탈린과 1949년 중국대륙을 공산화한 중화인민공화국의 마오쩌둥이 공화제(共和制)의 대한국(大韓國)을 공산화(共產化)하기 위해 탱크 242대, 전투기, 야포, 박격포 등 군사력을 전폭적으로 원조하여 대한국의 북부 지역 공산반군(共產叛軍) 괴뢰정부(傀儡政府)에 1950년 6월 25일 대한국 무력 침공을 지시하고 1953년 7월 27일 유엔연합군 수석대표와 중화인민공화국군, 대한국 북부지역 공산반군(共產叛軍) 괴뢰정부(傀儡政府) 인민군 대표가 판문점에서 6·25경인전쟁 정전협정(停戰協定)을 조인한 공화제의 대한국을 공산화(共產化)하려 무력 침공한 공산연합군과 대한국 공산화를 저지한 유엔연합군의 3차 세계대전(三次 世界大戰)이다.일본군국주의(日本軍國主義 Japanese militarism) 통감통치(1906-1910), 총독통치(1910-1945)가 대한국(大韓國:1897- ) 분단의 원인이다. 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군의 무조건 항복 요구를 일본군국주의가 거부하여 미군은 일본 영토에 원자폭탄 2개를 투하하였고 소련군은 대한국의 북부 지역에 진격했다. 1945년 8월 15일 대한국은 일본군국주의 총독통치에서 벗어나 독립하는 8.15 대한 광복을 하였으나 대한국은 이승만이 1948년 8월 15일 대한국 정부를 수립하였고 세계 공산국가의 지도국인 소련의 스탈린은 대한국 북부지역에 공산반군(共產叛軍) 괴뢰정부(傀儡政府)를 수립하였다. 대한국 북부지역 공산반군 괴뢰정부는 최고인민회의 간부회의를 통하여 남북통일을 위하여 점령군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하였다. 소련군은 1948년 12월 시베리아로 철수하였고, 1949년 6월 29일 미군은 대한국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약 500명의 군사고문단만 남기고 철수하였다. 그러나 공산반군(共產叛軍) 괴뢰정부(傀儡政府) 김일성은 소련을 방문하여 스탈린의 대한국 공산화 명령을 받았으며 스탈린은 소련의 무기들을 대다수 공산반군 괴뢰정부에 지원하였고 중국공산군 역시 참전하도록 하였다. 대한국 북부지역의 공산반군 괴뢰정부는 1949년 무렵부터 수 차례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의 마오쩌둥을 만났으며 마오쩌둥은 대한국을 무력으로 침공하여 공산화하는 계획에 매우 적극적이었고 스탈린은 공산반군 괴뢰정부에 소련제 T-34/85형 탱크 242대, 야크 전투기와 IL폭격기 200여 대, 야포와 박격포 등 전폭적인 군사력 원조를 하였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이 공산반군 괴뢰정부에 전쟁 원조를 하는 조건으로 공산반군(共產叛軍) 괴뢰정부(傀儡政府)의 대한국을 무력으로 침공하는 전쟁계획을 승인하였다.







소련군은 1948년 12월 대한국 북부지역에서 철수하였으나 소련 정부는 모스크바에서 군수뇌회담을 개최하여 철군이후의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고 '특별군사사절단'을 통해서 집행하기로 하였다. 이 회의에는 대한국 북부지역의 공산반군(共產叛軍) 괴뢰정부(傀儡政府)와 중화인민공화국의 고위 군부 대표도 참석하였다. 모스크바 계획이라고 불리는 전쟁준비 계획은 간도에 있던 의용군 부대로 대한국 북부지역으로 귀국시켜 5개 사단을 갖게 하고 이외에 8개의 전방사단과 우수한 장비를 보유한 8개의 예비사단, 그리고 500대의 탱크를 보유하는 2개의 기갑사단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1949년 2월 스탈린은 대한국 북부지역의 공산반군 괴뢰정부 수립 후 처음으로 김일성과 박헌영을 모스크바로 불러 군사력 원조를 논의하였다. 6·25경인전쟁을 앞두고 공산반군 괴뢰정부의 요청과 마오쩌둥의 지시에 의해 팔로군(八路軍) 중 한인 출신들로 의용군을 만들어 입북시켰다. 이 중 팔로군 4 야전군 휘하 55군단 164 사단은 간도지역에 주둔해 있는 한인들로만 구성된 단일부대로 1949년 7월 20일 입북하여 인민군 5사단으로 개편되었다. 입북한 사단 인원은 10,821명이다. 4 야전군 휘하 55군단 166사단은 국민당군을 쫓아 대만해협까지 진격한 역전의 사단이며 한중 혼성 부대이다. 원래는 166사단 중 1개 연대만 한인이며, 의용군으로 개편 과정에서 중국인들을 한인으로 교체하여 1949년 7월 20일 입북시켜 인민군 6사단으로 개편시켰다. 사단 병력은 10,320명으로 6·25경인전쟁 당시 걸어다니는 공수부대라고 불리며 미 24사단을 괴멸시키고 한국군 사단 대부분을 격파한 최강의 부대가 되었다. 이후 김일성의 요청으로 팔로군 156사단을 중심으로 139, 140, 141사단의 한인들을 모아 1950년 4월 경 입북하여 약 1만 4천 병력으로 인민군 7사단을 만든다. 그 외 중국인민해방군에 부대 단위가 아닌 개인적으로 복무 중인 한인들을 모아 1개 연대를 만들어 입북시키는데 이들은 오토바이 연대가 된다. 이렇게 하여 마오쩌둥이 보내준 한인으로 구성된 한인 출신 의용군은 3개 사단 5만명이다.







대한국 북부지역에서 6·25경인전쟁은 김일성과 박헌영의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김책, 무정도 적극적으로 찬성하였다. 리승엽 등 남로당 계열의 인사들도 찬성하였고 군사지도자들인 강건, 김웅, 김광협, 방호산, 이권무, 김창덕, 유경수 등은 남쪽과의 일전을 고대하였고 승리를 확신하였다. 대한국 북부지역의 공산반군 괴뢰정부는 6·25경인전쟁을 준비함에 앞서 대한국의 정보를 상당부분 알고 있었다. 특히 평양에서 발견된 공산반군 괴뢰정부 인민군 정보문건에 의하면 대한국 각 행정 소재지의 군(郡) 단위까지 1950년도의 쌀, 보리 등의 모든 농작물 예상 수확량이 세밀하게 기록돼 있었다. 공산반군 괴뢰정부 인민군은 이 정보를 바탕으로 대한국에서 한 해 동안 확보할 수 있는 식량의 규모, 즉 공출량을 계산한 상태였다. 특히 모든 종류의 주식은 물론이며 주식이 아닌 깨까지 군 단위별로 예상 수확량과 공출량을 매겨 놓았다. 공산반군 괴뢰정부는 주민들이 초가지붕을 고칠 여유도 주지 않음은 물론이고 당시 대한국에 전혀 전무했던 T-34/85를 확보해놓기까지 했으며 특히 대한시대 대한광복운동기(1906-1945)에 닦아놓았던 도로의 폭을 2배 이상 넓혀 놓기까지 하는 등 철저하게 준비했다. 인민군 949군부대는 6월 24일 오전 1시 38선 부근에 야전병원을 설치하고 의료요원들을 각 해당 부분에 배치하였다. 공산반군 괴뢰정부는 13만 5천여 명의 지상군을 확보하고 있었는데 대한국의 병력은 정규군 19만 5천여 명, 해양경찰대 9천여 명, 경찰 68만 5천여 명 등이었다. 인민군은 소련제 T-34/85형 탱크 242대, 야크 전투기와 IL폭격기 200여 대, 각종 중야포와 중박격포로 무장하고 있었다. 대한국 공군은 정찰만을 위해 쓸 수 있는 L-4 연락기 및 L-5 연락기, 캐나다로부터 구입한 T-6 텍산 10대를 추가한 것이 전부였다. 육군은 탱크와 장갑차는 전무했으며, 유일한 독립 기갑연대의 장비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도 정찰용으로 쓰인 37mm 대전차포를 탑재한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 1개 대대가 전부였다. 또한 포병은 105mm 화포와 4.2인치 박격포만으로 무장하고 있었는데 사단 당 1개 대대만 배치되어 있었고, 포탄도 부족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대한국 북부지역 공산반군(共產叛軍) 괴뢰정부(傀儡政府) 인민군은 공산국가들의 주력 전차인 소련제 전차 242대, 야포를 앞세우고 38선 남쪽의 대한국을 공격해 왔다. 단 한 대의 전차도 없는 무방비 상태에서 공격을 당한 대한국 국군은 공산반군(共產叛軍) 괴뢰정부(傀儡政府) 인민군에게 밀려 후퇴하였다. 군용차가 거리를 질주하고 3군 장병들은 빨리 원대로 복귀하라는 마이크 소리가 요란해지면서 조금씩 동요하기 시작했다. 오전 7시가 넘어서야 방송은 공산반군 괴뢰정부 인민군이 침공해 왔다는 소식만 간단히 전하고 장병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빨리 원대복귀하라는 공지방송만 반복하였다.1950년 6월 26일 밤 10시 30분 경 이승만은 도쿄에 있는 미국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하였다. 6월 27일 새벽 2시에 이승만은 대전행 특별 열차를 타고 대전으로 내려갔다. 6월 27일 새벽 4시에 열린 비상 국무회의에서 정부의 수원 천도가 정식으로 의결되었다. 이승만은 대전에서 사흘을 머무른 뒤, 7월 1일 새벽에 열차편으로 대전을 떠나 이리에 도착하였다. 7월 2일에는 다시 목포에 도착하였고, 배 편으로 부산으로 옮긴 뒤 7월 9일 대구로 옮겨갔다. 공산반군 괴뢰정부 인민군이 미아리 고개까지 쳐들어오자 그 때서야 서울 시민들은 대피하기 시작했다. 6월 27일 저녁에 서울 근교까지 밀어닥친 인민군들과 육박전을 감행했으나 워낙 전세가 불리하여 대한국은 정부를 대전으로 옮겼다. 대한국 정부는 인민군이 한강을 넘어서 진격할 것을 우려해 6월 28일 새벽 2시 30분경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한강에 단 하나뿐인 다리였던 한강철교를 폭파하였다. 한강 철교의 폭파로 국민들은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고 인민군은 서울을 넘어 부산, 포항과 경상도 동해안, 대구, 울산, 경주, 영천과 그 이남을 제외한 모든 지역을 점령하게 되었다.







공화제(共和制)의 대한국(大韓國) 정부는 전쟁이 일어나자 주미 한국대사 장면과 서기관 한표욱에게 긴급 훈령을 내려 미국 국무부에 사태의 긴급성을 알렸고, 6월 26일 주미한국대사 장면은 백악관으로 미국 대통령 트루먼을 방문, 미군의 대한국(大韓國:1897- ) 파병을 요청하였다. 미국은 유엔(UN) 안보리를 열어 한국 문제를 건의했다. 이에 따라 유엔(UN) 안전보장이사회는 6월 26일 오전 4시에 소집되었고,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인민군의 즉각적인 전투 행위 중지와 38도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요청하는 결의안을 9대 0으로 가결하였다. 같은 날 주미한국대사 장면은 미국 상, 하원의원들을 찾아다니며 한국에 파병해줄 것을 호소하였고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프랑스, 콜롬비아, 터키 등 16개국의 회원국이 유엔군을 조직하여 6·25경인전쟁에 참전하기에 이르렀다. 그 동안 대전까지 들어온 인민군이 진로를 세 방면으로 나누어 호남, 낙동강, 영천, 포항 등지로 육박하자, 대전에서 대구로 내려와 있던 대한국 정부는 다시 부산으로 이동하였다. 한편 한국군을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의 지휘 하에 편입, 대폭 증강하여 낙동강을 마지막 방어선으로 삼고 반격하였다. 미국과 유엔(UN)은 대한국 영토에서 공산반군 괴뢰정부 인민군을 철수하라는 결의를 공산반군 괴뢰정부에 통고했으나 이에 응하지 않아 6월 27일 유엔(UN) 안보리 이사회는 공산반군 괴뢰정부에 대해 대한국 땅에서의 즉각 철수를 권고하였다. 회원국들에게 군사 공격을 격퇴하고, 그 지역의 국제평화와 안전을 회복하는데 필요한 원조를 대한국에 제공할 것을 7대 1(기권2)로 결의했으며, 이 날 해리 S. 트루먼은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대한국에 대한 해군, 공군의 지원을 즉각 개시하라"고 명령했다.







맥아더는 6월 29일 하네다에서 비행기를 타고 수원으로 와서 한강방어선지역을 시찰하고 워싱턴에 지상군 투입을 요청하였다. 6월 30일 해리 S. 트루먼이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지상군 투입과 38선 이북의 군사 목표를 폭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함에 따라 7월 1일 미국 육군 24사단 21연대가 부산에 상륙했다. 결국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프랑스, 콜롬비아, 터키 등 16개국의 회원국이 유엔(UN)연합군을 조직하여 6·25경인전쟁에 참전하기에 이르렀다. 프랑스에서는 프랑스군의 전설로 불리는 명장 몽클라르 장군이 6·25경인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자신의 계급을 스스로 중장에서 중령으로 강등시키고 대대장의 직함으로 프랑스 군을 이끌고 미군에 예속되어 참전하였으며 터키군의 영웅 타흐신 야즈즈 장군 역시 2개 여단 병력을 이끌고 참전했다. 콜롬비아의 게릴라 용병부대가, 에티오피아의 경우 황제의 특명에 의해 아프리카 원주민 병력과 정규군과 황제 친위대가, 뉴질랜드의 마오리족 등등 참전국은 다양한 에피소드를 갖고 대한국을 도와주기 위해 참전했다. 이들 중 총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 이들은 본국에서 창과 화살을 준비해오기도 했으며 미군에서 총을 지급해주기도 했다.7월 1일 영국과 프랑스는 "유엔군사령부의 설치와 유엔 회원국들의 무력 원조를 미국 정부의 단일 지휘 아래 둔다"는 공동결의안을 유엔 안보리에 제출했다. 이 결의안은 7월 7일 7대1(기권3)로 가결되었다. 이에 따라 미국을 비롯하여 오스트레일리아·벨기에·캐나다·콜롬비아·프랑스·그리스·에티오피아·룩셈부르크·네덜란드·뉴질랜드·필리핀·타이·터키·영국·남아프리카 연방 등 16개국 군대로 유엔(UN)연합군이 편성되었다.8월까지 인민군은 대구까지 내려왔다. 그러나 낙동강 전선에서 국군과 미군의 강렬한 저항으로 교착상태에 빠졌고 치열한 교전이 계속되었다. 대한국 국군 1사단장 백선엽은 다부동에서 인민군의 침공을 격퇴하고 8월 3일 유엔(UN)연합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쳤다.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의 지휘를 받은 미군은 새벽 5시 시작된 공격 준비 사격에 이어 미 5해병연대 3대대가 전차 9대를 앞세우고 월미도 전면에 상륙하였다. 월미도는 2시간 만에 완전히 미군에 의해 장악되었다. 미군은 부상 7명의 경미한 피해를 입었으며, 공산반군(共產叛軍) 괴뢰정부(傀儡政府) 인민군은 108명이 전사하고 106명이 포로로 잡혔다. 이어 국군 17연대, 미군 7사단, 미국 1 해병사단이 주도한 인천반도 공격이 이어졌다. 공산반군(共產叛軍) 괴뢰정부(傀儡政府) 인민군 18사단과 인천 경비 병력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간 미군 1해병사단과 국군 해병 1연대는 인민군의 주력이 규합할 시간을 성공적으로 빼앗아버리며 인천 장악에 성공하였다. 그 후 서울을 빼앗긴 지 3개월 만인 9월 28일에 공화제(共和制)의 대한국(大韓國) 수도 서울을 되찾았다. 이어 달아나는 인민군을 뒤쫓아 38선을 돌파하여 10월 10일에는 원산을, 10월 19일에는 평양을 점령했다. 이어 10월 26일에는 서부는 청천강 북부와 압록강의 초산에 이르렀고, 중부는 장진호까지 진격했으며, 동부는 압록강의 혜산진까지 진격했다. 또한 11월에는 백두산 아래 갑산에서 함경북도 온성을 경유하여 녹둔도로 흐르는 바다인 북대한해(北大韓海)까지 진격하였다. 김일성은 공산반군(共產叛軍) 괴뢰정부(傀儡政府)와 인민군을 미리 10월 9일에 북쪽으로 거의 모두 철수시킨 다음에 10월 12일부터 평양에서 철수했다. 대한국 북부지역의 공산반군(共產叛軍) 괴뢰정부(傀儡政府)는 강계를 임시 수도로 정했다. 대한국 국군 및 유엔(UN)연합군에 의한 대한국의 통일을 눈 앞에 두었을 때 김일성은 중화인민공화국의 마오쩌둥을 만났다.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의 마오쩌둥은 미국이 대한국 북부지역 공산반군 괴뢰정부를 이기면 머지않아 바로 중화인민공화국도 공격할 것이고, 미국이 중화인민공화국을 공격하기 시작하면 타이완도 중화민국 통일을 위해 쳐들어올 거라는 추측으로 인해 결국 마오쩌둥은 한반도에서 미국과 싸워서 중화인민공화국, 대한국 북부지역 공산반군 괴뢰정부의 공산주의 혁명을 지켜야 되는 목표를 삼았었다. 그래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중국군이 사단급의 병력으로 참전하여 반격해 왔다.







당시 중화인민공화국은 내전이 갓 끝난 상황으로 대부분의 인민이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던 시기였으므로 참전자가 매우 많았다.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참전할 당시 소련이 중공에게 많은 무기를 보내줬고 소련군이 몰고 있는 전투기들도 중공 마크를 달고 공격하기도 하였다. 의용군을 바탕으로 중국군이 인해전술로 공격해왔다. 중국군은 미군의 압도적인 화력에 노출되지 않기 위해 주로 야간 이동을 하고 요란한 악기 소리를 동원해 어둠을 틈 타 기습하는 등 지형지물을 정교하게 이용한 공격을 감행했다. 이러한 예상치 못한 반격에 한국군과 유엔군은 38도선 이북에서의 대대적인 철수를 계획하였다. 이후 대한국은 12월 4일에 평양 철수를 하고 이어 대한국 북부지역 공산반군 괴뢰정부는 12월 6일에 수도 평양을 되찾았다. 한편, 12월 9일부터는 유엔(UN)연합군이 원산을 철수하였고, 12월 14일부터 24일 사이에 동부 전선의 한국군 12만 명과 피난민 10만 명이 흥남 부두에서 해상으로 철수했고, 1월 4일에는 서울을 다시 내주었다. 1월 7일에는 수원이 함락되었다. 중국군은 계속 남진했으나 한국군은 이미 병력과 장비를 정비하여 반격 태세를 갖추었다. 유엔군과 한국군은 북쪽 땅인 원산 등 기타 지역에 폭격을 가했다. 이승만은 2월 15일 대한국 통일을 목표로 분명히 밝히고 미국에도 통보하였다. 중국군은 10여만 명의 전사자를 내면서 퇴각하였고, 3월 2일에 한국군이 한강을 넘어서 14일에는 서울을 되찾았다. 3월 24일 이승만은 한중 국경까지 진격하기 전에 휴전은 안 된다고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유엔군은 38선을 넘었고 방어선을 쳤다. 38선 부근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전투가 오랫동안 계속되었고 소련이 전투에 부분적으로 참전하였다. 이승만은 1951년 6월 9일 6·25경인전쟁 휴전의 결사반대를 선언하였고 6월 27일 소련의 정전안을 거부하였다. 1951년 7월에 정전 회담이 개시된 후 정전이 되면 각기 점령 지역에서 국경이 정해지는 조건으로 싸우는 제한 전쟁이 벌어졌다. 1951년 9월 20일 이승만은 휴전 수락의 전제조건으로 중국 인민지원군 철수, 대한국 북부지역 공산반군 괴뢰정부 인민군 무장해제, 국제 연합 감시 하 총선거를 요청하였다. 군사분계선 문제는 이미 1952년 1월 27일에 타결되었으며 1952년 5월에 이르러선 포로 교환 문제를 제외하곤 거의 대부분 의제에 합의하였다.







6·25경인전쟁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참전으로 전선이 고착화하자 미국은 현상유지 차원에서 정전협정을 추진하였다. 미국은 소비에트 연방 및 중화인민공화국 측과 6·25경인전쟁 정전을 논의하였다. 1952년 3월 이승만은 대한국이 분단 상태에서 전쟁 중인 양방이 합의하여 일시적으로 전투를 중단하는 정전(停戰)은 대한국에 대한 사형 선고나 다름없다고 주장하며 공화제의 단일국가로 통일하기 위해 단독으로라도 계속해 싸워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1953년 3월 5일 소련 스탈린의 죽음으로 정전 회담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어 1953년 3월 19일 소련 내각은 6·25경인전쟁을 정치적으로 마감한다는 결정을 중화인민공화국과 대한국 북부지역 공산반군 괴뢰정부에 통보하면서 부상 포로의 우선 교환에 동의하도록 지시했다. 1953년 5월 30일 이승만은 아이젠하워에게 보낸 친서에서 다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요구하였다. 대한국 북부지역 공산반군 괴뢰정부는 소련을 통해 정전을 제의하였고 유엔(UN)연합군 측의 승인으로 6·25경인전쟁 정전이 성립되었다. 대한국은 전쟁 중인 양방이 합의하여 일시적으로 전투를 중단하는 정전(停戰)을 반대하였으며 1953년 7월 27일 유엔(UN)연합군 수석대표 해리슨 중장과 중화인민공화국군, 대한국 북부지역 공산반군 대표 남일(南日)이 판문점에서 6·25경인전쟁 정전협정(停戰協定)을 조인하였으며 공산반군 괴뢰정부가 공산연합군과 유엔연합군의 6.25경인전쟁 정전협정(停戰協定)을 파기 선언하였으므로 황해도와 경기도의 경계,함경도와 강원도의 경계를 이은 분계선 획정을 재협상하여 경기도 북부와 강원도 북부를 대한국 정부가 관할해야 한다.일본군국주의(日本軍國主義 Japanese militarism) 통감통치(1906-1910), 총독통치(1910-1945)가 대한국(大韓國:1897- ) 분단의 원인이며 6·25경인전쟁은 소련의 스탈린과 중화인민공화국의 마오쩌둥이 공화제의 대한국을 공산화하기 위해 군사력을 전폭적으로 원조하여 대한국의 북부 지역 공산반군(共產叛軍) 괴뢰정부(傀儡政府)에 1950년 6월 25일 대한국 무력 침공을 지시하고 1953년 7월 27일 유엔연합군 수석대표와 중화인민공화국군, 대한국 북부지역 공산반군 대표가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을 조인한 3차 세계대전(三次 世界大戰)이다. 대한국(大韓國:1897- ) 북부 지역의 공산반군(共產叛軍) 괴뢰정부(傀儡政府)가 정전협정을 파기 선언하여 정전협정 조인 이전 상황이 되었으므로 황해도와 경기도의 경계,함경도와 강원도의 경계를 이은 분계선 획정을 재협상하여 경기도 북부와 강원도 북부를 대한국 정부가 관할해야 한다.
2015-06-23 12:2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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