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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식절(寒食節),어버이날,어린이날 통합 법정 공휴일(3일 연휴)로 지정해야
icon 김민수
icon 2015-06-06 20:28:43  |   icon 조회: 5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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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식절(寒食節),어버이날,어린이날 통합 법정 공휴일(3일 연휴)로 지정해야



묘제(墓祭) 봉행하는 영절(令節) 한식절(寒食節)을 법정 공휴일(3일 연휴)로 지정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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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9년 2월 19일 조선국 2대 국왕 정종이 한식절(寒食節)에 친히 조선국 1대 국왕 태조(太祖) 이단(李旦)의 비(妃)인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의 능(陵)인 제릉(齊陵)에 제사하였다. 1409년 3월 13일 태종이 제릉(齊陵)에 나아가 한식절제(寒食節祭)를 행하고 돌아와 개성(開城)을 통치하기 위하여 설치한 유후사(留後司)에 머물렀다. 1410년 2월 22일 태종이 문소전(文昭殿)에 나아가 한식절제(寒食節祭)를 행하였다. 처음에 임금이 향(香)·축(祝)을 전(傳)하는 것을 인하여 좌우(左右)에게 한식절(寒食節)에 대하여 물으니 김여지(金汝知)가 대답하기를 “한식절(寒食節)은 동지절(冬至節) 후 105일이 옳습니다. 이 때에는 빠르게 부는 바람과 세차게 쏟아지는 비인 질풍심우(疾風甚雨)가 있기 때문에 역가(曆家)에서 한식절(寒食節)이라 한 것입니다.”하였다. 1411년 3월 5일 태종이 한식절(寒食節)에 친히 건원릉(健元陵)에 제사하였다. 사냥을 흥인지문 밖 동교(東郊)에서 구경하였다. 1413년 2월 24일 한식절(寒食節)에 경기 도관찰사(京畿 都觀察使)에게 명하여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의 묘에 제사하게 하였다.







1421년 2월 24일 세종이 광효전(廣孝殿)에 나아가서 한식절제(寒食節祭)를 지냈다. 1431년 2월 26일 문무백관이 정전(正殿)에 모여 한 달에 4회 검은 옷을 입고 문안(問安)드리는 조참(朝叅)을 받고, 문무 관원이 윤번으로 궁중에 참석하여 임금의 질문에 응대하던 윤대(輪對)를 행하고, 임금에게 유학의 경서를 강론하는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세종이 말하기를 “한식절(寒食節)이란 찬 밥을 먹는 까닭에 이르는 것인가. 또 한식절(寒食節)에는 불을 쓰지 못하는가.”하니, 정인지(鄭麟趾)가 대답하기를 “옛 시(詩)에 이르기를 ‘푸른 연기 흩어져 다섯 등급의 제후인 5후(五侯) 집으로 들어가네.’ 하였사오니, 이는 반드시 하사(下賜)하시기를 기다려서 불을 썼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하였다. 세종이 말하기를 “내가 국왕의 친림(親臨) 아래 거행된 군사훈련을 겸한 수렵대회인 강무(講武) 중에 화재가 있었음을 듣고 생각하기를 청명절(淸明節)에는 아침 나절에는 바람이 없다가 오후가 되면 바람이 비로소 일기 시작하는데 3일간을 불을 쓰지 않는다면 어려울 것이나 아침 불을 땔 때에 저녁밥까지 함께 짓고 오후에는 전연 불을 쓰지 않는 것이 옳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성벽(城壁)으로 둘러싸인 안 성중(城中)에 명령하지 않았던 것이 뉘우쳐진다. 이에 대한 고제(古制)를 상고하여 임금에게 의견을 아뢰는 계달(啓達)하라.”하였다.







1431년 3월 27일 국가의 예제(禮制)를 정하기 위하여 설치한 상정소(詳定所)에서 아뢰기를 “금 번에 받자온 승정원의 담당 승지를 통하여 전달되는 왕명서(王命書)인 전지(傳旨)에 ‘매 년 한식절(寒食節)에 3일간은 이른 아침에 불을 때어 밥을 지어놓고 종일 화기(火氣)를 금한다.’고 하옵신데 대하여 도제조(都提調) 우의정 맹사성은 신하가 정사(政事)에 관한 의견을 임금에게 올리는 헌의(獻議)하기를 ‘마땅히 내리신 전지(傳旨) 그대로 해야 합니다.’ 하고, 의정부에 속한 종1품 벼슬인 찬성(贊成) 허조 등은 헌의하기를 ‘실화(失火)란 때가 없는 것이고, 또 원사(元史)에 염희헌전(廉希憲傳)에 이르기를 ‘백성들이 반드시 범하고 말 일은 금하지 않아야 한다. ’고 하였습니다. 이 법을 비록 세우더라도 민가에서 반드시 범하게 되어 형을 받고 감옥에 갇히는 투옥(投獄)되는 자가 많을 것이니, 바람기가 있는 날을 당하면 금화도감(禁火都監)에서 관아에서 심부름하는 사람인 사령(使令)을 나누어 보내서 각 방(坊)을 순행하며 일절 화기를 금하게 하옵소서.”하니, 세종이 이를 병조에 내렸다.







1431년 4월 1일 병조에서 아뢰기를 “삼가 사림광기(事林廣記)를 살펴보니, 형초기(荊楚紀)에 이르기를 ‘동지절(冬至節)에서 105일이 지나면, 몹시 빠르고 거세게 부는 바람인 질풍(疾風)과 심한 비가 있으니 한식절(寒食節)이라 이른다. 진(秦)나라 사람은 한식절(寒食節)을 숙식일(熟食日)이라 부르는데, 그 것은 불을 때지 아니하고 미리 익힌 음식을 장만하여 한식절(寒食節)을 지낸다는 말이다. 제(齊)나라 사람은 냉연절(冷烟節)이라 부르기도 하고, 또는 금연절(禁烟節)이라고 이르기도 한다.’하였고, 중국 남송(南宋)시대 맹원로(孟元老)의 저서인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에 이르기를 ‘동지절(冬至節) 뒤 105일이 한식절(寒食節)이 되는데, 하루 전날을 불을 때서 익히는 취숙일(炊熟日)이라고 이른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한식절(寒食節)에 불을 금하는 법은 예전부터 내려온 것이옵니다. 그러나 혹 음양(陰陽)이 때를 잃고 절서(節序)가 기일(期日)을 어기면 풍기(風氣)가 반드시 그 날에 동하는 것이 아니라 선후(先後)의 차이가 있사오니, 원컨대 지금부터 궁궐 밖에서는 청명절(淸明節) 3일 전에 이른 아침마다 바람이 잘 때에 불을 때어 음식을 익히기를 허락하고 그 날에 이르러서는 주야(晝夜)로 일절 불과 연기를 금하되 한성(漢城) 안에서는 방화 업무(防火 業務)를 관장하는 금화도감 낭청(禁火都監 郞廳)이 5부 관원(五部 官員)을 나누어 거느리고 방(坊)과 이(里)를 순행하며, 외방에서는 각 고을 수령들이 각 동리의 정장(正長)으로 하여금 각각 그 관내에 순행하여 고찰하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1452년 3월 7일 문종이 휘덕전(輝德殿)에 나아가서 한식제(寒食祭)를 거행하니, 백관(百官)들은 문종을 모시고 담복(淡服)을 입고 제사를 지내는 배제(陪祭)하였다. 1465년 3월 1일 왕세자가 영릉(英陵)·헌릉(獻陵)에 나아가 한식제(寒食祭)를 대행(代行)하였다. 1505년 2월 23일 10대 국왕 연종(묘호 추상)이 류순(柳洵)·박숭질(朴崇質)을 임금이 신하를 은밀히 불러들이는 명소(命召)하여 묻기를 “청명절(淸明節)에는 날씨가 따뜻하여야 할 터이거늘 어찌하여 이리 추운가? 대저 하늘은 위에서 운화(運化)하고 땅은 아래에서 조성(助成)하므로 만물이 자라는데, 내가 아무리 지휘하여 명령하는 호령(號令)을 발하고 펴더라도 아랫사람이 받들어 행하는 자가 없어서 그러한가? 옛 사람이 ‘한 여자의 원한에 6월에 서리가 내린다.’ 하였는데, 요사이 간사한 무리인 간도(奸徒)가 비록 그 죄가 죽여 마땅하였으되 오히려 분을 품고 풀지 않은 자가 있어서 그러한가? 전일 관료를 감찰, 탄핵하는 임무를 가진 대관(臺官)과 국왕을 간쟁(諫諍), 봉박(封駁)하는 임무를 가진 간관(諫官)인 대간(臺諫)이 재변을 만나면 반드시 어느 일이 잘못되어서 이런 변을 가져왔다고 하였는데, 이제는 대간이 간쟁(諫爭)을 잘하지 못하여서 그러한가?”하니 류순 등이 아뢰기를 “한식절(寒食節)에는 바람이 불기도 하고 비가 내리기도 하여 날씨가 고르지 못한데 올 해는 바람이나 비의 변이 없고 기후도 다른 해와 다름이 없으니 비록 조금 추운 기가 있으나 신 등은 재변(災變)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명국에서는 옛 사람이 2월에 꾀꼬리와 꽃을 말하였으나 우리나라에서는 3월이 지나고서야 날이 따뜻해지니 배꽃이 한창 피더라도 서리가 내리는 때가 있습니다. 대간은 사변(事變)을 당해야 논간(論諫)하는 것이므로, 아래의 뜻이 위에 통하는 것인데, 근자(近者)에는 거의 아뢸 일이 없는 까닭에 아뢰지 않을 따름이며, 일이 있다면 어찌 아뢰지 않으리까.”하니, 전교하기를 “어찌 대간이 간쟁하여야 아래의 뜻이 위에 윗사람에게 말이나 글로 여쭈어 알려 드리는 상달(上達)하겠느냐. 상하가 서로 온화한다면 논간하지 않고서도 아래의 뜻이 자연히 위에 상달되리라.”하였다.











1544년 8월 20일 죄인(罪人)을 거듭 심리(審理)하여 검사(檢査)하는 의정부(議政府)의 정5품(正五品) 벼슬인 검상(檢詳)이 좌·우상(左右相)의 뜻으로 아뢰기를 “황해도 개풍에 있는 조선국 2대 국왕 정종(定宗)과 정안왕후(定安王后)의 쌍릉인 후릉(厚陵)의 일은 신들이 사초(史草)를 살펴서 다시 의논하려 하였으나, 이제 마침 의정부(議政府)에 당상관(堂上官)들이 모여 큰 일을 의논(議論)하는 합좌(合座)하였으므로 5례의(五禮儀)를 살폈더니, 태묘(太廟)에서 떠난 신주(神主)는 한식절(寒食節)에만 제사한다는 것은 정례(定禮)가 있으니, 한결같이 예문(禮文)에 따라야 실로 마땅합니다. 그래도 사초를 다시 살펴야 합니까?”하니, 중종이 전교하기를 “후릉에 한식에만 제사하는 것은 정의(情義)가 미안하므로 의논하였으나 국조(國朝)의 세례(世禮)가 그러하다면 사초를 살필 것 없으니, 한식절(寒食節)에만 제사하도록 하라.”하였다. 1767년 2월 4일 내국(內局)에서 대궐에 들어가서 임금을 뵙던 입시(入侍)하였다. 영조가 하교(下敎)하기를 “남의 자식된 도리는 귀천(貴賤)이 없이 한가지이다. 한식절(寒食節)부터 사서인(士庶人)에게도 제주(祭酒)를 쓰도록 허락하고, 자신이 벼슬이나 문벌이 높은 집안의 사람인 사부(士夫)이면서 제사가 아닌데도 사사로이 술을 마시는 자는 초빙하여 맡기던 벼슬인 청선(淸選)을 허락하지 말라.”하였다. 1835년 3월 9일 헌종이 친히 빈전(殯殿)에서 한식(寒食) 별다례(別茶禮)를 행하였다. 1850년 2월 24일 철종이 효정전(孝定殿)에 나아가 한식제(寒食祭)와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1864년 2월 29일 고조 광무제가 빈전(殯殿)에 나아가 한식절(寒食節)의 별전(別奠)과 장사에 앞서 이른 아침마다 영전에 지내는 제사인 조전(朝奠)을 겸하여 지냈다. 1870년 1월 9일 예조에서 아뢰기를 “정조의 형인 의소세손(懿昭世孫)을 향사하는 사당인 의소묘(懿昭廟)의 신주를 태묘의 본전 안에 봉안한 위패를 영녕전으로 옮겨 모시는 조천(祧遷)하는 예(禮)를 거행한 뒤의 춘향대제(春享大祭)와 추향대제(秋享大祭) 및 의소묘(懿昭墓)의 한식절(寒食節) 제사에 쓸 축문(祝文)은 응당 다시 지어야 할 것이니, 예문관(藝文館)으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소서.”하니, 임금이 신하의 청을 허락하는 윤허(允許)하였다. 1891년 2월 28일 효모전(孝慕殿)에 나아가 한식제(寒食祭)를 지내고 이어 3년상 안에 혼전(魂殿)이나 산릉(山陵)에서 낮에 지내는 제사인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1896년 4월 2일 궁내부(宮內府)에서 아뢰기를 “양력(陽曆)을 반포한 후 각 능(陵)과 원(園)·묘(墓)의 한식절(寒食節) 제사는 청명절(淸明節)에 마련하는 것으로 신하가 아뢴 일에 대하여 임금이 재가(裁可)를 내리는 주하(奏下)를 받았습니다. 시신(屍身)을 안치하는 빈전(殯殿)의 한식절(寒食節) 제사도 청명절(淸明節)에 시행하소서.”하니, 고조 광무제가 임금의 명령(命令)인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이 번에는 한식절(寒食節)에 설행하라.”하였다. 1898년 4월 5일 경효전(景孝殿)에 나아가 음력 보름에 태묘에서 지내던 제사인 망제(望祭) 겸 한식절(寒食節) 제사를 지내고 아침마다 영전(靈前)에 음식을 올리는 조상식(朝上食)을 올렸으며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황태자(皇太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1899년 4월 3일 고조 광무제가 칙령(勅令)을 내리기를 “기쁜 일을 만나면 감동을 더하는 것이 죽은 사람이나 산 사람에게 어찌 다름이 있겠는가? 한식절(寒食節)에 마땅히 경효전(景孝殿)에 나아가 전작례(奠酌禮)를 직접 거행하고 제문(祭文)은 지어 내리겠다. 황태자의 효성스러운 생각에 병이 나은 이후 처음으로 가절(佳節)인 영절(令節)을 만났으니 마땅히 인정과 예의를 베풀어야 할 것이고, 또한 한식절(寒食節)에도 마땅히 친히 참배하고 잔을 올리는 작헌례(酌獻禮)를 직접 거행할 것이니, 제문은 황태자(皇太子)가 지어 내리도록 하라. 경운궁(慶運宮) 영성문(永成門) 남쪽에 명성황후(明成皇后) 신위(神位)를 모시던 혼전(魂殿)인 경효전(景孝殿)의 3주기(三周忌) 제사 후 황태자(皇太子)가 아직도 직접 잔을 올리지 못했으니 비록 사세(事勢)로 인하여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하나 그 성의와 효성으로 보아 슬프고 그리운 생각이야 어떠하겠는가? 내 달 음력 초하룻날마다 조상에게 지내던 제사인 삭제(朔祭)는 황태자(皇太子)가 황제를 대신하여 제사를 지내는 섭행(攝行)하는 것으로 마련하고 제문은 직접 지어서 내리겠다.”하였다. 12월 31일 고조 광무제가 칙령(勅令)을 내리기를 “방금 대신과 궁중(宮中)의 전식(典式ㆍ제향(祭享)ㆍ조의(朝儀)ㆍ아악(雅樂)ㆍ속악(俗樂)ㆍ능원(陵園)을 관장한 장례원(掌禮院) 당상에게 물어보았지만 태묘(太廟)를 추존한 뒤의 일이 되어 가는 형편이나 상황인 사체(事體)가 더없이 중요한 만큼 이제부터 섣달 그믐날 밤에 나라에서 지내던 제향(祭享)인 세모대제(歲暮大祭)를 지내며 새나 짐승을 잡아 태묘(太廟) 사직에 공물(供物)로 바치고 한 해 동안 이룬 농사와 그 밖의 일들을 여러 신(神)에게 고하는 동지절(冬至節) 후 셋째 미일(未日)인 납향절(臘享節)에는 단지 햇과일이나 햇곡식을 조상신(祖上神)에게 감사하는 뜻으로 올리는 천신례(薦新禮)만 거행하라. 그리고 태묘(太廟)와 전(殿), 능(陵), 궁(宮), 원(園)의 한식제(寒食祭)도 역대의 왕실이나 나라에서 경사나 상사가 났을 때 행하는 의식인 전례(典禮)대로 청명절(淸明節)에 제사를 지내라.”하였다.
2015-06-06 20:2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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