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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포(三浦) 왜노(倭奴) 작적(作賊)
icon 김민수
icon 2015-01-14 08:26:53  |   icon 조회: 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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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포(三浦) 왜노(倭奴) 작적(作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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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0년 4월 19일 경상좌도 병마 절도사 황형(黃衡)이 말을 타고 달려 와서 아뢰는 치계(馳啓)하기를 “왜노(倭奴)가 부산포 첨사를 겁박하여 죽이는 겁살(刦殺)할 때에 군사와 백성 모두 1백여 인을 죽였고, 동평현(東平縣) 민가 12호, 동래현(東萊縣) 민가 1백 98호를 불태웠습니다.”하였다. 4월 22일 부원수 안윤덕(安潤德)이 군관(軍官) 최임(崔林)을 보내어 첩서(捷書)를 아뢰기를 “4월 19일 신시(申時)에 군관 강윤희(康允禧)·곽한(郭翰) 등이 전장으로부터 치보(馳報)하기를 좌·우도 방어사 및 병마 절도사 등이 군관을 보내어 세 패로 나누어 적을 치고 주사(舟師)가 또 이르러 4면으로 협공하니, 왜적이 크게 패하여 제포 앞 물이 다 붉게 되었습니다. 벤 수효는 아직 정확히 알지 못하나 대개 40여 급(級)은 되겠고, 군사를 거느린 괴수는 거의 다 사로잡았으며 병장기 노획한 것이 또한 많고 화살에 맞아 바다에 빠져 죽은 자는 얼마인지 알지 못할 정도이며 통째로 침몰된 배가 3척인데, 우리 군사는 한 사람의 사상자도 없습니다. 그외 들어가 싸운 절차와 베고 빠져 죽은 수효는 뒤에 써서 아뢰겠습니다.”하니, 전교하기를 “최임이 친히 서로 싸우는 것을 보았는가.”하자 아뢰기를 “신이 밀양(密陽)에 있어서 친히 보지는 못하였습니다.”하였다. 중종이 상참(常參)을 받고 이어 최임을 불러 보고 들어가 싸운 절차를 자세히 진달하라고 명하니, 최임이 대답하기를 “19일 진시(辰時)에 교전하여 신시(申時)에 싸움이 끝났는데, 우리 군사는 한 사람의 사상자도 없었습니다. 강윤희는 적장 종성친의 말을 빼앗아 탔고 좌·우도 병선 합계 30여 척이 바다로 들어가고 황형·김석철·류담년은 세 길로 나누어 육지로 쫓아 들어가 쳤는데 맞아 싸운 자는 모조리 잡히고 달아나서 배를 타다가 화살에 맞아 죽은 자가 얼마인지도 알지 못할 정도입니다. 적선 3척이 침몰되고 배를 타려는 자가 있으면 왜구가 저희끼리 칼을 뽑아 팔뚝을 쳤습니다.”하였다.



6월 28일 경상도 관찰사 윤금손(尹金孫)이 치계하기를 “이라다라(而羅多羅)는 왜(倭)가 아니라 제포(薺浦)에서 아내를 얻어 사는 항거 왜(恒居 倭)로 우리 나라 말을 잘하고 자못 지략이 있어 속이는 변사(變詐)가 무궁하니 놓아 보내서는 안 됩니다.”하였는데, 도체찰사가 널리 여러 의논을 거두어 처치하기를 청하니 중종이 ‘그리하라’ 하였다. 류순(柳洵)·김수동(金壽童)·류순정(柳順汀)·성희안(成希顔)·노공필(盧公弼)·민효증(閔孝曾)·이계남(李季男)·홍경주(洪景舟)·신윤무(辛允武)·신용개(申用漑)·강혼(姜渾)·박열(朴說)·정광필(鄭光弼)이 의논드리기를 “이라다라가 아내를 얻어 제포에 산 지가 이미 오래서 원거 왜(元居 倭)와 다름이 없고 비록 적의 음모 적모(賊謀)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나 이 또한 반적(叛賊)의 도당으로 사람됨이 지략과 변사가 많은 것을 변방 백성이 다 압니다. 전일에 금부에서 추문할 때에 말하는 것이 또한 권변(權變)이 많아 그 모략이 족히 도중(徒衆)을 모아 변방의 근심을 만들 수 있으니, 왜국의 사신이라 하여 돌려보낼 수는 없습니다. 대저 두 나라가 화친할 때에도 오히려 저들로 하여금 우리의 허실을 알게 할 수 없는데, 하물며 흔단을 얽어 적이 되었는데이겠습니까. 더욱 사기(事機)를 누설하여 우리의 얕고 깊은 것을 엿보게 할 수 없습니다. 지금 변보(邊報)가 또 이르렀으니, 다만 이라다라 뿐 아니라 관(館)에 머물러 있는 여러 왜인도 변방 일이 조금 평정되는 것을 기다려서 천천히 의논하여 돌려보내도 늦지 않습니다. 충주(忠州)에 있는 자는 도중에 있어 자못 우리의 군사기밀인 군기(軍機)를 알았으니, 끝내 놓아보낼 수 없습니다. 조종조의 고사에 의하여 서북 궁벽한 고을 벽읍(僻邑)에 나누어 두는 것이 마땅합니다.”하였다.



김응기(金應箕)는 의논드리기를 “이라다라는 원래 제포에 늘 거주하는 자가 아니고, 일찍이 제주 사람을 쇄환(刷還)한 공으로 사정(司正)의 직을 받아 1년에 한 번씩 내조(來朝)하는데, 나올 때에 포(浦)에 도착하여 두어 달을 머물렀다가 상경하고, 포에 돌아온 뒤에 진관(鎭官)이 곧 양식을 주지 않았으므로 모두 오래 머물다가 돌아가는 것이 예이며, 내조한 왜노가 포에 머물러 아내를 얻는 것 또한 예사입니다. 윤금손의 서장(書狀)에 ‘매 년 한두 번은 본토에 왕래하는데, 들어가면 5∼6개월씩 머문다.’ 하였으니, 여러 포(浦)의 항거 왜인(恒居 倭人)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하물며 적왜로 더불어 처음부터 음모에 참여하지 않는데이겠습니까. 전 의논에 의하여 돌려보내는 것이 매우 마땅합니다. 다만 지금 왜선 30여 척이 가덕도(加德島)에 와서 닿았는데, 소요를 일으킬지 우호를 청할지는 미리 헤아릴 수 없으니, 천천히 변장이 치보(馳報)하는 것을 보아서 다시 의논하여 시행하소서.”하니, 전교하기를 “지금 의논한 것을 보니 한결같지 않다. 다만 이라다라가 함께 서계를 받아 가지고 왔으니, 지금 어떻게 ‘너는 일본 왜가 아니니 보낼 수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변방 일이 종식되지 않았으니 놓아 보낼 수는 없으나, 또한 다시 널리 의논하여 처치하라.”하고 6조 참판 이상과 홍문관·대간·한성부 좌우윤(漢城府 左右尹)·예문관(藝文館)을 명초(命招)하여 의논하게 하였다.



류순정 등이 아뢰기를 “저 번에 왜선 5척이 와서 말하기를 ‘3포에 사는 왜인이 김세균(金世鈞)을 데리고 나올 것이다.’ 하였다 합니다. 지금 그 정세를 들으니, 김세균을 데리고 화친인 걸화(乞和)나 소요를 짓는 작모(作耗)에 불과합니다. 김세균을 데리고 와서 화친인 걸화(乞和) 때에 대답할 말은 이미 통지하여 일렀습니다. 만일 과연 도둑질인 작적(作賊)하려고 왔다면 군사를 정돈하여 변을 기다려서 칠 만하면 칠 것이나, 군사는 멀리 헤아리기 어려워서 미리 도모할 수는 없으니, 이 것으로 이르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지난 번에 왜선이 왔을 때에 옷을 벗어 휘두르며 불러서 서로 말을 통하여 육지에 내려오게까지 하고 즉시 물리치지 않았다 하여 조정에서 추고하기를 계청(啓請)했는데, 이보다 앞서 방어청(防禦廳) 관아(官衙)와 관아 사이에 공사와 관계되는 일을 조회하기 위하여 보내는 문건(文件)인 문이(文移)에 만일 소요를 일으키고자 하면 치고 통언(通言)하고자 하거든 그 말하는 것을 들으라 하였으니 지금 말을 서로 통하고 치지 않은 것으로 견책을 한다면 전에 말한 것과는 어그러짐이 있습니다. 왜적이 반드시 자주 내침할 것이니 함부로 칠 것이 아니라 성을 지키는 것이 가합니다. 쳐서 이기지 못하면 사의(事宜)에 손상이 있으니 지금 만일 치지 않은 것으로 죄를 삼는다면 군졸이 반드시 해를 받을 것이고 변장 또한 수족을 놀릴 수 없을 것입니다.”하였다. 전교하기를 “종1품 또는 정2품 체찰사가 이미 하유(下諭)하였고 또 지금 왜구가 대거 침입하여 왔으니 변장을 추고해서는 안 된다.”하였다.





8월 24일 왜인 평시라가 죄인이 범죄 사실에 대해 진술한 공사(供辭)하기를 “대대로 국은(國恩)을 입었으므로 오로지 사변(事變)을 고하기 위하여 나왔을 뿐 다른 마음은 없습니다. 제포(薺浦)의 성이 함락된 뒤에 대마도주가 대관(代官) 종성친(宗盛親)과 더불어 의논하고 여러 섬에 청병(請兵)하니, 여러 섬의 추장들이 다 응락하였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올 선척(船隻)과 군사의 수(數)는 적실하게 알 수 없으나, 11월 이후에는 바다에 풍랑이 험악하여 배를 운행할 수 없기 때문에 9∼10월 사이에 나오려 하고 있습니다. 또 왜의 별종(別種)인 가연조기(加延助機)가 박다(博多) 등의 섬에 흩어져 살고 있는데 항상 처자를 배 안에 싣고 다니면서 도둑질하는 것을 일삼고 있습니다. 낯빛은 검고 털은 누르며 언어(言語)와 복식(服飾)이 여러 왜인과 다르고, 활 쏘는 데 능숙하고 또 칼을 잘 쓰며, 물 속에 잠수해 들어가서 배를 뚫는 것이 가장 그들의 장기인데 대마도주가 가연조기를 시켜서 먼저 와서 도둑질을 하게 하고자 합니다.



그들이 반란을 일으킨 근본 원인은 달과 날짜는 기억하지 못하나 전년에 대마도가 특히 종성명(宗盛明)을 보내어 새 도주의 도서(圖書) 받기를 청하는 일로 부산포(釜山浦)·제포(薺浦)에 와서 머무를 때에 부산포의 왜인 등이 제포 첨사(薺浦 僉使)가 상주(常住)하는 왜인을 침노한다는 일을 종성명에게 고소(告訴)하니, 종성명이 이 것을 도주에게 통서(通書)하고, 상경하였다가 포구에 돌아온 때에 부산포의 상주 왜인의 두목 등이 또한 와서 고소하였습니다. 종성명 또한 조정의 접대가 전례와 같지 않다고 하여 드디어 분한 생각을 품고 섬에 돌아가서 도주에게 군대를 보내어 입구(入寇)하여 첨사를 죽일 것을 권하니, 도주가 말하기를 ‘이제 조선이 망부(亡父)에게 치전(致奠)하려고 하여 사신이 장차 올 것이니, 내 마땅히 이 뜻을 조선에 고하여 제포 첨사를 치죄(治罪)하거나 혹은 해직하게 하겠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종성명이 그 말을 듣지 않고 몰래 종성친과 반란 모의하니 도주가 금지하지 못하였습니다.



장수로는 종성명이 수장(首將)이고 종성친이 아장(亞將)이며 노둔도로(老屯都老)가 3장(三將)이 되어서 병선(兵船)을 나눠 거느리고 작적(作賊)한다는 일을 들었을 뿐이요 그 나머지 절차는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3포 왜인 등이 안골포(安骨浦)에서 도둑질한 일은 도주가 모르고 있었는데, 3포의 항거 왜(恒居 倭) 중에 제포의 대조금두(大趙今豆) 등이 관하(管下)의 사람들을 거느리고 몰래 나와서 도둑질하고 돌아 들어간 뒤에 도주가 비로소 알고 성내어 말하기를 ‘내가 화친을 청하고자 하는데, 네가 함부로 들어가서 도둑질하여 화친의 길을 끊었으니 매우 부당하다.’ 하고, 그 중 10여 인을 죽였습니다. 모든 일은 도주가 종대선(宗大禪)과 더불어 의논하여 항상 그의 말에 좇았으나 도둑질한 뒤에 종대선이 도주에게 원한을 만들 수 없다는 일을 말하고 또 조선의 관직을 받은 사람을 보내어 화친을 청하라고 말하니, 도주가 말하기를 ‘내가 지금 스스로 먼저 흔단(釁端)을 야기하였으니 화친을 청할 낯이 없다. 만약 사람을 보냈다가 구류(拘留)하고 돌려보내지 않는다면 더욱 부끄럽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또 나이 젊은 용사인(用事人) 등이 또한 약탈하기 위해 침입하는 입구(入寇)하기를 권고하므로 도주가 종대선의 말을 듣지 않고 장차 군사를 일으켜 도둑질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위에 말한 젊은 용사인 등은 용감하고 건장함이 남보다 뛰어나며 활쏘고 말달리며 칼쓰는 것을 모두 잘 하는데, 항상 도주의 좌우에 있어서 밤낮 떠나지 않습니다. 대마도 사람들이 모두 잘 하는데 항상 도주의 좌우에 있어서 밤낮 떠나지 않습니다. 대마도 사람들이 모두 의논하기를 ‘조선 사람은 말달리며 활쏘는 일을 잘하니 만약 거마목(拒馬木)을 만든다면, 저들이 마음대로 달리면서 발사(發射)하지 못할 것이다.’ 하고, 지금 거마목을 많이 만들고 있습니다. 또 성을 공격하는 공성(攻城)할 망루(望樓)를 설치하여 성벽에 올라가기 위해 높이 만든 수레인 누거(樓車)를 만들고 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하니 중종이 대신들에게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류순(柳洵)·김수동(金壽童)·류순정(柳順汀)·성희안(成希顔)·민효증(閔孝曾)·권균(權鈞)·강혼(姜渾)·이계남(李季男)·이손(李蓀)·김응기(金應箕)·홍경주(洪景舟)·윤숙(尹珣)·신윤무(辛允武)·신용개(申用漑)·정광필(鄭光弼)·박열(朴說)·홍숙(洪淑)·김봉(金崶)·윤희평(尹熙平)·경세창(慶世昌) 등이 의논드리기를 “이제 평시라 등의 초사를 보니 3포(三浦)에서 도둑질한 일은 도주(島主)의 본의가 아니라 말하고 또 말하기를 ‘안골포를 도둑질한 일은 3포의 상주 왜인대조금두(大趙今豆) 등이 한 일로서 도주가 그의 함부로 입구(入寇)한 것을 성내어 10인을 죽였다.’고도 했습니다. 또 말하기를 ‘종대선 등이 사람을 보내어 청화(請和)하자고 하니, 도주가 내가 먼저 스스로 흔단을 만들었으니 청화할 면목이 없다고 말하였다.’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드디어 말하기를 ‘도주가 대관(代官) 종성친과 같이 의논하여 여러 섬에 청병하여 9∼10월 간에 나올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도주가 가연조기(加延助機)로 하여금 제 마음대로 도둑질하는 것을 허락하였다.’고도 하였습니다. 그의 말이 앞뒤가 변하고 간사하여 한편으로는 도주의 죄를 엄폐하고 한편으로는 도주의 위세를 과장하며, 이름은 비록 고변(告變)이라고 하나 실지로는 우리의 얕고 깊음을 엿보러 온 것입니다.



만약 경상도에 구수(拘囚)한 왜인들을 추국(推鞫)한다면 이 곳과 저 곳 왜인들의 거짓 꾸민 초사(招辭)가 반드시 서로 어긋나게 되어 그들의 실정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입구한다는 시기가 지나게 되면 그들의 고변이 진정인지 거짓인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니, 우선 잠시 그대로 수금(囚禁)해 두고 그 종말을 봐서 처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금후에 만약 투항(投降)을 빙자하여 화친을 빈다는 말을 하여 오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대답하기를 ‘너희들 섬이 나라의 후한 은혜를 배반하고 스스로 반란을 일으켰으니 죄가 용서할 수 없다. 마땅히 군사를 동원하여 죄를 물을 것이니 어찌 너희들이 화친을 청하며 속여서 우리를 늦추려고 속이는 말을 듣겠는가. 만약 도주나 대관(代官)이 그 죄악을 수창(首倡)한 자 수십 인을 죽이고 몸소 와서 항복한다면 마땅히 조정에 전계(轉啓)하여 그 거취를 품의(稟議)할 것이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고변’(告變)이라고 말할지라도 그 고변하는 사연만을 들을 뿐 접대하는 것은 허용하지 말 것이며, 혹 도주의 서계(書契)를 가지고 온 자가 있을 때에는 또 말하기를 ‘서계는 내 마땅히 전계하겠으나 너희들을 접대하는 일은 조정의 지령이 없으므로 감히 독단으로 처치하지 못하니 너희는 마땅히 급히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 만약 결말을 알고자 하거든 다시 와서 듣고 가도록 하라.’ 이렇게 유시(諭示)를 내리심이 어떠하겠습니까.”하니 중종이 그대로 따랐다.





10월 17일 성희안(成希顔)은 의논드리기를 “이라다라(而羅多羅)·평시라 등 전후하여 우리 나라에 온 왜인은 모두 37인입니다. 앞서 온 왜인은 처음부터 반란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무죄한 자들이며, 뒤에 온 왜인들은 뜻이 우리의 내정을 엿보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변방의 움직임을 보고하는 보변(報變)한다고 칭탁하였으니 실로 교사(狡詐)하고 반복(反覆)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 무리들은 사람의 탈을 쓴 짐승 같은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많이 책망할 것은 없습니다. 저 섬의 왜인들이 배은망덕(背恩忘德)한 죄를 스스로 알고, 이 전후해 온 왜인들이 오래도록 돌아가지 않으면 필시 모두 이미 죽임을 당하였다고 생각할 것이니, 그 부모·처자의 애통하는 정상은 눈으로 보는 듯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한다면, 다만 섬 안의 왜인들이 다 우리의 천지같이 포용하는 덕택에 감복할 뿐만 아니라, 그의 부모·형제·처자들은 우리의 덕(德)을 우러름이 반드시 깊을 것이니, 다른 날 얼굴을 고치고 마음을 돌려서 관(關) 문을 두드리며 화친을 비는 마음이 반드시 여기에서 말미암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왜로 하여금 우리의 위엄을 두려워하고 덕을 회앙(懷仰)하게 하는 것은 바로 오늘에 있습니다. 저들의 내구(來寇)를 우리가 제지함이 매우 엄하면 저들은 비겁하게 되고 우리는 용감할 것이며, 우리는 이기고 저들은 패할 것이요, 우리에게 훌륭한 장수와 용맹한 사졸이 있어서 수어(守禦)하기를 견고하게 한다면 저들이 마침내 강화를 청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지금의 사세를 살펴보니 남을 내 뜻대로 다루어 순종하게 하는 조종(操縱)의 주도권이 우리에게 있어 한 번 이 기회를 잃어버리면 두 번 다시 때를 얻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만약 돌아가는 길을 허락하여 그 마음을 감격시키지 않고 정성을 마치는 길을 막아 벌이 쏘는 듯한 독기를 양성(釀成)한다면 세월이 지나가는 사이에 우리의 수졸(戍卒)이 피곤하게 될 것이며, 병가(兵家)의 승패 또한 헤아리기 어려울 것입니다. 틈을 타서 가만히 발병(發兵)하여 침노해 소요함이 그치지 않을 때에 만에 하나라도 실수하는 일이 있게 된다면, 해를 입음이 참혹할 것입니다. 그리 되면 저들의 기세는 점차 펴지고 우리 군사는 위축할 것인데, 혹시나 다시 양계(兩界)에 일이라도 생겨서 장사(將士)를 나누어 지키게 되면 병력은 약하게 덜어질 것입니다. 이러한 때를 만나서 비로소 그 온 왜인을 돌려보내 정성을 바칠 것을 유도(誘導)할 계획을 한들 일찍이 규획(規畫)하지 못한 후회를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가령 저들이 속히 청화(請和)한다면 반드시 하나같이 전일의 접대 절목(接待 節目)과 같이하여 조금도 차감(差減)하지 말아서 저들의 마음을 쾌하게 할 것이며, 그들이 다시 와서 살기를 원할지라도 우리는 단연코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또 접대 절목 중에도 또한 바꾸고 없앨 일이 많으므로 저들이 비록 청화하여도 우리는 즉시 허락해서는 안 되며, 저들도 또한 우리의 조건을 즐겨하지 않을 것이니, 이 것은 일조 일석에 결정될 것이 아니고 세월만 경과하게 될 것입니다. 저들이 어찌할 수 없는 사세에 절박하게 된 뒤라야 혹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그 무리를 오래도록 유치하여 저들의 평화를 원하는 시기를 늦출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온 왜인의 수가 37인에 이릅니다. 만약 저들이 향읍에 섞여 살면서 영원히 우리 백성되는 것을 허락한다면 모든 의지해 살아갈 기구를 갖추어 주지 않을 수 없으며, 이 땅의 부녀자로써 아내를 삼게 해야 할 것이고, 세월이 오래되면 자식들이 반드시 많아질 것이니, 이족(異族)의 무리가 불어나 퍼지는 것은 진실로 작은 사고가 아닙니다. 만약 천천히 그 사세를 살펴서 때를 기다려 돌아가는 것을 허락한다면 우리 나라 여러 곳의 허실을 다 알고 가서 왜국에 전파하게 되어 사체가 온편치 않을 것입니다. 이해를 깊이 따져보니 속히 석방하여 돌려보내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평시라와 같은 자는 본래 귀화한 왜로서 국도(國都)에 와서 살면서 나라의 은혜를 입은 것이 심중(深重)한데 서계(書契)를 가지고 가서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았으며, 이제 또 변방의 움직임을 보고하는 보변(報變)을 거짓 칭탁하니 기만하고 간사함이 막심합니다. 이라다라는 흉칙하고 교활하여 측정할 수 없어서 평소부터 변민(邊民)들이 꺼리는 자이니 저들과 우리 사이에 바야흐로 흔단(釁端)이 생긴 이 때에 이들을 함께 돌아가게 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니 그대로 계속 유치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신의 의견이 이와 같으므로 전일에도 이렇게 논의하였던 것입니다.”하였다.
2015-01-14 08:2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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