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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둔도(鹿屯島)
icon 김민수
icon 2014-12-29 10:00:16  |   icon 조회: 3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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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둔도(鹿屯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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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8년 8월 27일 세종이 녹둔도(鹿屯島)를 소나무를 기르기 적당한 의송지(宜松地)로 치부(置簿)하였다. 1455년 8월 10일 세조가 함길도 도절제사(咸吉道 都節制使) 양정(楊汀)에게 이르기를 “녹둔도(鹿屯島)의 농민들이 들에 흩어져 있을 때 골간(骨看) 등이 배를 타고 몰래 들어와 약탈(掠奪)할까 염려되니, 은밀히 진장(鎭將) 및 만호(萬戶)에게 유시하여 그 방어를 엄히 더하도록 하라.”하였다. 1486년 2월 22일 이계동(李季仝)은 성종에게 아뢰기를 “조산(造山)의 군사와 백성들은 봄에 녹둔도(鹿屯島)에 들어가서 농사짓고, 수확하고 나면 본보(本堡)로 돌아와서 방수하는데, 그 왕래에 반드시 배를 사용하므로 백성들이 매우 고생스러워, 모두 섬에 남아 살면서 방수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 섬에는 땅에 진흙이 없어서 그 보(堡)의 벽을 모두 풀이나 지푸라기를 쓰고 모래와 섞어서 바르는데, 바람이 불거나 비가 한 차례 지나가면 무너져서 남는 바가 없습니다. 만약 적변(賊變)이라도 당하게 되면 어떻게 방수하겠습니까? 또 홍수가 나면 반드시 물에 떠내려갈 것이니, 백성들로 하여금 머물러 살게 할 수 없습니다.”하였다.



1509년 4월 29일 류순정(柳順汀)이 중종에게 아뢰기를 “녹둔도(鹿屯島)는 비옥하여 경작할 만하나, 다만 조산보(造山堡)의 수자리 사는 군졸은 모두 수군(水軍)으로 거의 모두가 잔열(殘劣)하고 적을 대비할 기구 또한 허술합니다. 만약 경작하는 시기에 혹 적변(賊變)이 있으면 반드시 노략질인 창로(搶擄)를 입을 것이니 그 이해를 따져 보면 예전처럼 경작을 금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하였다. 1510년 3월 5일 좌의정 류순정이 아뢰기를 “녹둔도(鹿屯島)가 비옥(肥沃)하여 경작할 만한데 녹둔도는 적의 길은 물이 깊어 왕래하기 어렵고, 우리 나라 사람이 가서 경작하는 길은 물이 얕아 다니기가 쉽다 합니다. 조산보 만호(造山堡 萬戶)로 하여금 그 곳으로 보(堡)를 이설(移設)하게 하여, 경작 수확할 때에 수호하면 적이 요격할 수 없고, 백성은 경종(耕種)할 수 있습니다. 관찰사 고형산(高荊山)이 그 곳의 험하고 평탄함을 자세히 아니, 청컨대 고형산에게 효유하여 조산보를 옮기는 이해와 경종할 때에 수호하는 편리 여부를 심사하여 치계(馳啓)하게 함이 어떠합니까?”하니, 중종이 그대로 따랐다.



1542년 5월 21일 지평(持平) 임형수(林亨秀)가 아뢰기를 “전 일 경흥(慶興) 본진(本鎭)에 강제로 입거(入居)시켰던 사람들을 조산보(造山堡)에 많이 들여보냈었는데 땅은 좁고 사람은 많으므로 조정이 의논하여 녹둔도(鹿屯島)에 들어가는 것을 허가하였다. 이제는 입거한 사람이 죄다 유망(流亡)하고 겨우 열 집이 있는데도 녹둔도에 가서 경작한다. 봄에 농사지을 때가 되면 만호(萬戶)가 군민(軍民)을 거느리고 본보(本堡)를 비우고 녹둔도에 가서 성과 기계를 만들다가 가을이 되면 본보로 돌아오는데, 갈 때와 돌아올 때에 모두 가산(家産)을 나르므로 이 때문에 백성에게 항산(恒産)이 없어서 거의 다 유망하였다. 만호 등이 왕래하지 않으려 하나 감사(監司)에게 의심받을까 하여 마지 못해서 한다는 것입니다. 신이 보건대, 이 쪽에도 황지(荒地)가 많고 또한 죄다 개간하지 못하는데 여전히 녹둔도로 넘어가서 경작하므로 백성들이 지탱하지 못하니, 지극히 온편하지 못합니다.”하였다.



1587년 10월 4일 병조 판서 정언신(鄭彦信)이 아뢰기를 “녹둔도(鹿屯島)에 논밭을 일군 기경(起耕)은 전부 신에게서 발의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적호(賊胡)들이 침범해 와 사람과 가축들을 약탈하는 창략(搶掠)해 갔다는 소문을 들었으니, 이는 모두 신의 그릇된 생각으로 말미암아 빚어진 일입니다.”하니 선조가 전교하기를 “녹둔도는 오랑캐의 지역 노경(虜境)과 너무 가까워 오랑캐들이 침입하는 침일(侵軼)은 일반적인 일로서 처음부터 이같은 일이 생기리라는 것을 우려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녹둔도는 조종조 때부터 우리의 농장이었는데, 경이 군량이 어려운 형편인 향간(餉艱)에 놓인 것을 목도하고 백성들을 들여보내 농사를 짓도록 한 것인데 이 것이 어찌 잘못인가. 경이 국사(國事)에 마음을 다하는 충성에야 어찌 손상됨이 있겠는가. 부디 이 것 때문에 스스로 위축되지 말고 알면서도 하지 않는 일이 없도록 하라.”하였다.



12월 26일 북병사(北兵使) 이일(李鎰)이 녹둔도(鹿屯島)가 함락되었다고 치계하였다. 서장(書狀)에 이르기를 “군관(軍官) 김몽호(金夢虎)의 수본(手本)에 ‘지난 9월 24일 녹둔도의 접전(接戰)에서 힘껏 싸우다가 전사한 사람은 신급제(新及第) 오형(吳亨)과 임경번(林景藩) 등 11인이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제단(祭壇)을 설치하고 제사를 지낼 때 향수(香水)로 목욕시키며 자세히 살펴보니, 오형은 얼굴이 가로로 잘리는 횡참(橫斬)되고 목덜미 두항(頭項)의 왼쪽도 비스듬히 절단되는 횡절(橫截)되었으며 등에는 화살을 맞은 봉전(逢箭)하였습니다. 임경번은 왼쪽 겨드랑이에 화살을 맞는 중전(中箭)하였고 얼굴에도 화살을 맞았습니다. 삼가 살피건대, 녹둔도가 함락될 적에 장사(將士)와 군민(軍民)들은 한결같이 모두 바람에 쓰러지는 풍미(風靡)하듯 속수무책으로 잡혀가는 취전(就縳)된 사람이 여러 사람이었지만 오직 오형 등 11인만이 모두들 용맹스럽고 날랜 군사로서 몸으로 적의 칼날을 막으며 죽을 때까지 항전(抗戰)하였습니다.”하였다.



1605년 5월 29일 선조가 이르기를 “정언신(鄭彦信)이 녹둔도(鹿屯島)에 둔전을 설치했다가 끝내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둔전도 쉽지는 않다.”하자 영의정 류영경(柳永慶)이 아뢰기를 “녹둔도의 경우 크게 벌렸던 까닭에 성공하기 어려웠으나 지금은 각 진보(鎭堡)에 각각 군사를 늘려 편리한 대로 실행한다면 군량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조충국(趙充國)도 한편으로는 수비하고 한편으로 둔전하였으니, 지금 그 계모를 따라 둔전을 설치해야 할 것입니다.”하였다. 1652년 5월 16일 전 장령 안방준(安邦俊)이 보성(寶城)에서 효종에게 상소하기를 “선묘조(宣廟朝)에 국가를 맡은 대신이 밀도 있는 계획과 원대한 생각이 없이 녹둔도(鹿屯島)의 둔전(屯田)으로 백성들을 추쇄(推刷)하여 민심을 크게 잃었습니다.”하였다.
2014-12-29 10: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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